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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12절 정남면(正南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97
제12절 정남면(正南面)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는 정림면(正林面)과 정송면(貞松面) 등의 명칭이 나타난다.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는 정림면에 11개의 동이 보이는데 덕촌(德村), 용정리(俑井里), 물면리(物面里), 내촌(內村), 사근동(沙斤洞), 고지동(高芝洞), 용수동(龍水洞), 일대리(里), 망우리(忘憂里), 신기(新基), 제지촌(題只村) 등이 속해 있다. 또한 남곡면(南谷面)에 지금의 정남면의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남곡면은 예전에 정송면(貞松面)이었고, 부 남쪽으로 30리 거리에 19개 동이 있었으며 귀래동(歸來洞), 단구(丹邱), 사근촌(沙斤村), 발산리(鉢山里), 신촌(新村), 한적동(閑寂洞), 봉황동(鳳凰洞), 와곡(瓦谷), 당두(唐頭), 문학동(文學洞), 오곡(梧谷), 신기촌(新基村), 갈천(葛川), 만은동(晩隱洞), 괘랑리(掛浪里), 모산리(牟山里), 보통천(甫通川), 판전(板田), 오일리(五逸里) 등의 마을 지명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정남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남곡면과 정림면을 합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 계향리(桂香里)

이 마을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계수나무 암수 한 쌍이 있어서 인근 마을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그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계상골(桂相谷) 혹은 기상골이라고 부르다가 1949년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한자로 적으며 계향리가 되었다고 전하며 마을에서 구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사람들이 활달하고 인정 많고 너그러운 기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 황새골 : 이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이 숲으로 황새가 많이 날아와 살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으로 불려졌다고 전한다.
○ 검단이〔단구동〕 : 황새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2. 고지리(古支里)



[사진-90. 고지리 마을 전경(2002)]

『화성지』의 정림면(貞林面) 마을 편에 고지동(高芝洞)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고지리로 추정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마을 한복판에 온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쓰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샘이 풍부하고 물맛 또한 좋아서 고지물 또는 고주물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고지리(古支里)로 적었다고 전한다.

3. 관항리(官項里)

마을에 있는 태봉산(泰峰山)을 두고 높고 귀한 관리가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고 해서 관골(官谷) 마을과 높고 큰 골짜기에 마을이 위치한다고 하여 항골(項谷)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관항리로 정하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마을에서 구전되는 바에 의하면 마을 있는 태봉산의 정상의 모습이 머리에 있는 두관(頭管)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 만은동(晩隱洞)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남곡면(南谷面:남곡면은 예전에 정송면(貞松面) 이었음) 마을 편에 만은동(晩隱洞)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도 불렸던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태봉산 줄기가 둥글어 마을이 숨어 있는 것처럼 앞에서 잘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모양인데 마을 앞쪽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마을에 재앙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소나무를 심어 마을을 가려야 된다고 믿고 소나무 숲을 만드니 비로소 마을에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막은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된 것이라고 마을에서는 전해지고 있다.
○ 탑산동(塔山洞) : 이 마을 골짜기 곳곳에는 고구려 시대부터 사원(寺院)과 탑(塔)이 많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지금도 마을 주민들에 의하여 흩어진 비신(碑身)을 모아 세운 3층 석탑이 남아있으며 탑산골이라고도 부른다.

4. 괘랑리(掛囊里)



[사진-91. 괘랑 1리 새터말 입구]​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괘랑리(掛浪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단종(端宗)조 때에 문신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5대손 김연석(金演錫)이 이 마을로 낙향하여 효행을 실천하며 살았는데 그는 자신의 효행을 적은 글을 항상 주머니에넣어 매달아 놓고는 하루 세 번씩 반성하며 울었다고 전하는데 그의 효행을 기려 그의 집을 모행제(慕行齊)라 했으며 주머니를 매달아 놓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정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수곡(秀谷) : 이 마을에는 뺄대라고 하는 풀이 무성하여 농사도 잘 안되고 사람들의 통행에도 지장을 많이 주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빼골이라고 불렀고 한자로 빼어나다는 뜻의 수(秀)자를 써서 수골(秀谷)이라고 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많은 마을 사람들이나 인근에서도 이 빼골이란 풀이 어떤 풀인지 알지 못한다. 필자가 추측하기론 예전에 방죽 같은 곳에 많이 자라던 삘기풀이 아닌가 생각된다.
○ 각곡(角谷) : 마을의 모양이 소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남산밑〔남산동(南山洞)〕 : 각골 북쪽 남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 신촌동(新村洞) : 조선 중엽 정조가 부왕의 묘를 융릉(隆陵)으로 옮기면서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해서 새텃말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신촌동(新村洞)으로 적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신기촌(新基村)이 표기되어 있어 지금의 이 마을이라고 추정된다.
○ 내갈천(內葛川)〔안가리내〕 : 이 마을 역시 위의 마을 신촌동과 마찬가지로 갈천(葛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갈천(葛川) 냇물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안가리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는 내갈천(內葛川)으로 썼다고 전한다.

5. 귀래리(歸來里)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귀래동(歸來洞)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 공촌부곡(工村部谷)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 이 마을을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데 산세가 험하고 산에 산적들이 있어 무사히 넘기가 힘들어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歸來) 산다고 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속명으로는 구래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방아못 : 구래울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방아처럼 생긴 큰 못이 있었다고 한다.

6. 금복리(錦福里)

이 마을은 예전에 정림면(貞林面)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금의 금복리(錦福里)로 정남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중엽 이 마을에 마음씨가 곱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운 착한 새댁이 살았는데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시주를 오면 정성껏 잘하여 이 새댁을 검복골댁(儉福谷宅)이라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하며 검복골이라고 불렸다.

7. 내리(內里)

이 마을은 『화성지』의 정림면 마을 편에 내촌(內村)이 보이고 또한 남곡면에는 사근촌(沙斤村)이 보이는데 이 두 마을이 오늘날의 내리로 추정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안암(內岩)· 사근절이 두 마을을 병합하여 정남면에 편입하였는데 이 마을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사은(士隱)절이 : 예전에 이 마을 근방에는 사찰이 많아 이 절에 많은 선비들이 숨어 살았다고 하여 사근절이 혹은 사은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안암(安岩) : 내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8. 덕절리(德節里)

이 마을도 마찬가지로 『화성지』의 정림면 마을 편에 덕촌(德村)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마을이라고 추정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현재 찾을 수는 없지만 예전에 이 마을에 덕절(德寺)이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선비들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하여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났다고 전하는데 1914년에 새터말· 황터· 창말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정남면 덕절(德節)리로 되면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 새터말 : 덕절리에서 가장 뒤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창말(倉村) :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고을에 흉년이 들거나 큰 홍수가 나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기 위한 곡식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황(黃)터 : 마을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 황(黃)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는데 아주 인색하고 인정이 없어 스님이 시주를 오면 시주는 하지 않고 악담만 퍼부어 마침내 집안 망하고 황씨가 살던 터만 남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9. 망월리(望月里)

이 마을도 『화성지』의 정림면 마을 편에 망우리(忘憂里)가 보이는데 지금의 망월리로 추정된다. 이 마을 뒷산인 망월산 동쪽은 넓게 트여 있어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주민이 온통 이 산에 올라 일년의 운수를 빌었다고 하는데 달[月]을 바라보는[望]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또는 망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 그리고 또한 일설에는 정월 대보름에 둥글고 밝은 보름달을 쳐다보며 일년의 운수대통을 빌고 나면 모든 근심(憂)을 잊는다(忘) 하여 처음에는 망우리였으나 나중에 망월리로 변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10. 문학리(文學里)



[사진-92. 문학 2리 마을 입구와 표석 ]​

『화성지』 남곡면 마을 편에 문학동(文學洞)이 표기되어 있어 지금의 문학리라고 생각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봉황동(鳳凰洞)·오곡동(梧谷洞)· 방죽말· 쑥뎅이· 와곡동(瓦谷洞) 등의 여러 마을을 병합하여 현재의 정남면 문학리로 편입되면서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 조선시대 중엽부터 이 마을에 전주(全州) 최(崔)씨가 정착하면서 문학을 숭상하며 배움에 열심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봉황동(鳳凰洞) : 예전부터 이 마을은 숲이 우거지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봉황새가 날아와 오색 빛을 띠고 암수가 짝짓기를 하면서 5음(五音)으로 아름답게 울었다고 하여 봉골(鳳谷) 혹은 봉황동(鳳凰洞)이라 하였는데 이렇게 봉황새가 마을에 나타나면 마을에는 큰 경사가 있었다고 전하며 봉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도 봉황동(鳳凰洞)이 표기되어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불려진 마을 지명이라고 추정된다.
○ 오곡동(梧谷洞) : 이 마을에는 봉황새들이 먹고산다는 오동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오곡(梧谷)이 표기되어 있어 당시에도 마을지명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 방죽머리 : 이 마을은 고려시대에 제촌부곡(堤村部谷)이 있던 마을로 현재 문학 4리 앞 들판은 조선시대 말엽에 제방을 쌓고 방죽(저수지)을 만들어 이 지역일대에 농사짓기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게 된 데서 방죽머리 혹은 방죽말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쑥뎅이 : 문학 4리 입구에 있는 이 마을의 논둑과 밭둑에는 쑥이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마을지명이라고 전한다.
○ 5상골〔오상곡(五相谷)〕 :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엽에 전주 최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어느 날 꿈에 이 곳으로 이사해 살면 앞으로 다섯 명의 재상(宰相)이 나올 것이라 하여 곧 후손들을 모두 이 마을로 이사시켜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의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고 전하여 마을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 와곡동(瓦谷洞) : 조선 중엽 전주 최씨 문중에서 판서를 배출하자 집을 짓기 위하여 가마를 만들어 기와를 구워 집을 지었다고 하여 당시로는 귀한 기와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기와집말로 불렀으며 이 말이 변하여 가집말이라 하였고 한자로 적으며 와곡동(瓦谷洞)으로 썼다고 한다.

11. 발산리(鉢山里)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발산리(鉢山里)가 표기되어 있으며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삼거리·가리내 두 마을을 병합하여 정남면 발산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뒷산의 모습이 흡사 주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리산이라고 하는데 마을 이름을 바리미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적으면서 발산(鉢山)리로 썼다고 한다.
○ 갈천(葛川) : 이 마을은 현재 정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뒤로 흐르는 냇물을 갈천(葛川)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이 갈천 냇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도 갈천이라 했으며 순우리말로 가리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12. 백리(栢里)

예전에 이 마을에는 곧게 자라는 잣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잣나무골 또는 잣말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오산의 독산성을 침공하면서 왜장인 가토기요마사(加藤正)이 부하들에게 잣나무가 많은 마을은 침략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 덕분에 이 마을은 피해를 면했다고 하며 그리하여 이 마을을 정송(貞松)이라 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오리골, 점말, 양지편을 병합하여 백리(栢里)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오리골〔오리곡(梧里谷)〕 :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오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3. 보통리(普通里)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보통천(甫通川)이라는 지명이 오늘날의 보통리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농토가 넓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사진-93. 보통리 저수지와 주변 마을(2002) ]​

○ 새봉재〔모산동(茅山洞)〕 : 이 곳에는 예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온갖 새들이 모여들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양지(陽地)말 : 이 마을은 서북쪽이 산으로 막혀 있어 겨울에도 다른 곳에 비하여 따뜻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보통리의 맨 끝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동(南洞)이라고도 불린다.
○ 연유동(蓮柳洞) : 예전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연유동 혹은 연유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쪽골 : 양지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쪽이 많았다고 한다.
○ 구억말〔국말〕 : 쪽골 서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다.
○ 대추나무골〔헌담안〕 : 쪽골 북쪽의 마을로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시묘(侍墓)골 : 대추나무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가 시묘를 살아서 붙은 이름이다.

14. 수면리(水面里)

『화성지』의 정림면 마을 편에 물면리(物面里)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 곳이 지금의 수면리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물이 귀하여 농사짓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물이 풍부하기를 바라며 물면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아주 수면리(水面里)로 마을 지명을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15. 신리(新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정림면 마을 편에 신기(新基)로 나와 있어 지금의 신리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신기에서 신촌(新村)으로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신(新)리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 붉은구리〔단구동(丹邱洞)〕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단구(丹邱)로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의 토질이 아주 붉은 황토색이어서 비만 오면 온통 황토색이 된다고 하여 붉은골 혹은 붉은구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내발산(內鉢山) : 현재의 발산리와 합쳐서 바리미라고 불리던 것이지만 바리산(鉢山)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내발산 혹은 안바리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6. 오일리(五逸里)

『화성지』의 남곡면 마을 편에 오일리(五逸里)가 표기되어 있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엽 어떤 도사(道士)가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지형을 살펴보더니 다섯 번 큰 일을 당하고 다섯 번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여 오일리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나 원래의 마을 이름은 오곡(五谷), 다시 말해 오실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 오실이 오일로 변음되고 이것을 한자로 적으며 오일(五逸)리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94. 오일리 여의동 전경]

○ 여의동(如意洞) : 오일리의 남쪽 마을로 마을의 형국이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여목이라고 부르게도 되었으며 또한 일설에는 조선 말엽 이 마을에 이(李)씨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매사가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고 하여 여의동(如意洞)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기도 한다.

17. 용수리(龍水里)

『화성지』 정림면 마을 편에 용수동(龍水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마을 한 가운데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서 용(龍)이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전하며 그리하여 이 연못을 용소(龍沼)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용수리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용수말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18. 음양리(陰陽里)

이 마을은 산이 동쪽과 남쪽으로 가로막혀 남쪽을 막은 산은 음지(陰地)를 이루어 그 곳 마을은 음지말이라고 불렀고, 또한 동쪽을 막은 산은 양지(陽地)가 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양지말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합쳐 음양(陰陽)리로 정하였다고 전한다.

19. 제기리(諸岐里)

이 마을은 원래 지대가 낮고 갈림길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1914년에 제기리로 지어졌으며 지대가 낮은 마을이라 하여 저지(低地)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