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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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전 관료] 홍은열(洪殷悅), 생몰년 미상·홍천하(洪天河), 생몰년 미상
카테고리
화성의 향토인물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68

홍은열은 남양(南陽) 홍씨(洪氏) 당홍계(唐洪系)의 기시조(起始祖)로서 왕건(王建)이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로 즉위하는 데 익대(翼戴)한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이요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태사(太師)의 관직을 지낸 인물로 전해온다. 여러 문헌 기록에 따르면, 당홍계 남양 홍씨가 남양을 본관으로 쓰게 된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즉 당홍계 남양 홍씨의 선시조(先始祖)는 1대 시조 홍은열로부터 수백 년 전 사람으로 전해온다. 몇 가지 기록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우선 조선 1454년(단종(端宗) 2)에 쓰인 『남양홍씨세보』 서문에는 “남양 홍씨의 근원은 오래되었다. 전해오는 기록에는 ‘당(唐)에서 재능 있는 선비 여덟사람을 보내와 고구려 사람을 가르치게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홍(洪)이었다.
당성군 서쪽 20여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남양홍씨문헌록』 구보서(舊譜序))”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당에서 재사(才士) 여덟사람을 파견하여 와서 고구려 사람을 가르쳤는데 홍(洪)이 그 중에 한 사람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남양도호부, 고적, 고당성)”라 하였고, 『동국여지지』에서는 “세상에 전하기를 당 말기에 학사 여덟사람을 파견해 와 고구려 사람을 가르쳤으니 홍(洪)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동국여지지』 권2, 경기, 남양도호부, 고적)”라 하였다. 그리고 『전고대방』에서는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년간에 고구려가 학사와 예(藝)에 통한 사람을 청하자 당에서 재능 있는 자를 파견하여 오니 홍(洪)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전고대방』 만성시조편)라 하였다. 위 자료를 간추려 정리해 보면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627~649)의 고구려 보장왕 때 당에 사신을 보내 학예에 뛰어난 사람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자 당 태종이 8명의 학사를 보내주었는데 그 가운데 홍(洪)의 성을 지닌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지금 남양 땅인 당성군의 서쪽 20여리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조선 조정의 장원서(掌苑署)가 관할하던 과원이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李穡, 1328~1396)은 이 사람이 신라에 와서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군자를 배출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색은 그를 덕산(德山)이라는 촌주(村主)라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하였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옛 기록에서는 이 사람을 바로 남양 홍씨의 시조로 전하고 있다. 홍은열을 1대 시조로 모시고 있는 현재의 당홍계 남양 홍씨도 이 사람을 선시조로 보고 있다. 당홍계 남양 홍씨측과 근래 나온 여러 성씨문헌 기록은 홍씨 성을 지닌 이 사람의 이름을 천하(天河)라고 한다. 천하는 고구려에서 유학을 가르쳐 문화를 개척하였고, 신라에서는 선덕여왕때 역시 유학을 발전시켰으며, 삼국통일 후 신라에서 유학을 발전시킨 공으로 문무왕 때 당성백(唐城伯)에, 신무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에, 그리고 효소왕 때에는 당성후(唐城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천하가 처음 고구려에 올 무렵 지금의 남양 땅이 당시 당성(唐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므로 이 곳을 관향으로 은사 받아 당성 홍씨의 원조가 되었다는 것이 공통된 기록이다. 한편 당홍계 남양 홍씨 측에서는 홍천하의 후손으로 중시조인 홍은열을 고려 개국공신 4인 가운데 한 사람인 홍 유(洪儒)와 동일 인물로 보려하는 듯 하다. 홍은열이 고려 개창에 공을 세우자 태조가 중국 은(殷)의 어진 신하 부열(傅說)과 같다 하여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것이다. 홍은열이 고려 개국공신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고려 말 정치가요 학자인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74)나 이색도 인정하였다. 한편 홍유는 『고려사』·『고려사절요』등 관찬사서에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과 함께 모의하여 왕건의 고려 태조 등극을 주도한 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홍유는 처음 이름이 술(術)이요 의성부(義城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은열과 홍유가 개국공신이라는 점은 같으나 처음 이름이 유(儒)라는 홍은열과 처음 이름이 술이요 의성인이라는 홍유가 동일인인가는 일단 의심이 간다. 더욱이 백문보나 이색이 홍은열을 언급하면서 역사서에 개국공신으로 널리 알려진 홍유와의 관계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없고, 1454년 『남양홍씨세보』 서문을 쓴 남양 홍씨 16대손이라는 홍일동(洪逸童)도 홍유에 대해 역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홍은열과 홍유가 동일인인가의 여부 주장은 근래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일인인가의 여부를 떠나 같은 고려시대 말엽에 살았던 백문보나 이색이 홍은열을 개국공신으로 기록하고, 관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유사하게 기록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개국공신 홍은열이 남양 홍씨 당홍계의 시조로써 남양에서 실제 살았든 아니든 남양 지역과 밀접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홍유와 홍은열이 동일인인가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하겠다. 홍천하의 당성사적비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옛 성터에 세워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