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 부서 | 성명 | 소속 및 직위 | 담당 분야 |
|---|---|---|---|
| 화성학연구소 | 심일종 소장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연구소 운영 총괄 |
| 정찬모 부소장 | 화성시지역학연구소장, 화성문화원 이사 | 지역 실무위원 총괄 | |
| 한동민 위원 | 화성시독립기념관 관장 | 지역학·독립운동사 분야 | |
| 김덕묵 위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 민속기록 분야 | |
| 최종성 위원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역사·종교 분야 | |
| 이관준 위원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 |
| 박재형 위원 |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 학술·향토문화 분야 |
[고려이전 관료] 김칠(金七), 생몰년 미상·최승규(崔承珪), 생몰년 미상
카테고리
화성의 향토인물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69
김칠과 최승규는 신라말 고려초 수성군(水城郡)의 호족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서 약관 20세에 남쪽으로 후백제 정벌을 나섰을 때(900년, 효공왕 4) 휘하의 무리 200여 명과 함께 왕건에게 귀순하여 충성을 다한 것으로 전해 온다. 당시는 신라 말기이면서 후삼국시대로 전국이 호족의 득세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하였다. 특히 남양을 중심으로 화성지역은 중국으로 통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 정부는 물론이고 궁예의 후고구려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지방 호족세력의 득세에 따른 국력의 미약,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궁예의 세력 때문에 사실상 이 곳을 장악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곳에 거주하는 호족 등 유력세력은 기울어가는 신라 왕조보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는 궁예의 세력과 손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마침 궁예의 후고구려가 견훤의 후백제를 향한 남정(南征)에 나서면서 수성군과 당성군도 그 대상이 되었고, 김칠이나 최승규도 저항 없이 귀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등극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이들은 공신이 되었고, 이들의 활동영역인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그리고 주의 장관은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에서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성군으로 바뀌면서 관할 영역도 평택지역 북부와 아산만 해변까지 확대되었고 헌덕왕 때에는 현재의 남양인 당은현까지 포함되었으니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그 후 수주, 수원부(水原府), 수원군(水原郡),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유수부(留守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관할지역도 그에 따라 확대 혹은 축소되었지만 역대로 지금 화성시의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부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원 관아(官衙)가 조선 1789년(정조 13) 팔달산 동쪽 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현재의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었다고 볼 때 김칠과 최승규는 지금 화성시 일대에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군사력을 갖춘 영향력 있는 호족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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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과 최승규는 신라말 고려… 작성일 22-06-08 09:39김칠과 최승규는 신라말 고려초 수성군(水城郡)의 호족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서 약관 20세에 남쪽으로 후백제 정벌을 나섰을 때(900년, 효공왕 4) 휘하의 무리 200여 명과 함께 왕건에게 귀순하여 충성을 다한 것으로 전해 온다. 당시는 신라 말기이면서 후삼국시대로 전국이 호족의 득세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하였다. 특히 남양을 중심으로 화성지역은 중국으로 통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 정부는 물론이고 궁예의 후고구려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지방 호족세력의 득세에 따른 국력의 미약,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궁예의 세력 때문에 사실상 이 곳을 장악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곳에 거주하는 호족 등 유력세력은 기울어가는 신라 왕조보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는 궁예의 세력과 손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마침 궁예의 후고구려가 견훤의 후백제를 향한 남정(南征)에 나서면서 수성군과 당성군도 그 대상이 되었고, 김칠이나 최승규도 저항 없이 귀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등극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이들은 공신이 되었고, 이들의 활동영역인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그리고 주의 장관은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에서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성군으로 바뀌면서 관할 영역도 평택지역 북부와 아산만 해변까지 확대되었고 헌덕왕 때에는 현재의 남양인 당은현까지 포함되었으니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그 후 수주, 수원부(水原府), 수원군(水原郡),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유수부(留守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관할지역도 그에 따라 확대 혹은 축소되었지만 역대로 지금 화성시의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부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원 관아(官衙)가 조선 1789년(정조 13) 팔달산 동쪽 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현재의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었다고 볼 때 김칠과 최승규는 지금 화성시 일대에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군사력을 갖춘 영향력 있는 호족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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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과 최승규는 신라말 고려… 작성일 22-06-08 09:39김칠과 최승규는 신라말 고려초 수성군(水城郡)의 호족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서 약관 20세에 남쪽으로 후백제 정벌을 나섰을 때(900년, 효공왕 4) 휘하의 무리 200여 명과 함께 왕건에게 귀순하여 충성을 다한 것으로 전해 온다. 당시는 신라 말기이면서 후삼국시대로 전국이 호족의 득세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하였다. 특히 남양을 중심으로 화성지역은 중국으로 통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 정부는 물론이고 궁예의 후고구려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지방 호족세력의 득세에 따른 국력의 미약,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궁예의 세력 때문에 사실상 이 곳을 장악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곳에 거주하는 호족 등 유력세력은 기울어가는 신라 왕조보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는 궁예의 세력과 손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마침 궁예의 후고구려가 견훤의 후백제를 향한 남정(南征)에 나서면서 수성군과 당성군도 그 대상이 되었고, 김칠이나 최승규도 저항 없이 귀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등극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이들은 공신이 되었고, 이들의 활동영역인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그리고 주의 장관은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에서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성군으로 바뀌면서 관할 영역도 평택지역 북부와 아산만 해변까지 확대되었고 헌덕왕 때에는 현재의 남양인 당은현까지 포함되었으니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그 후 수주, 수원부(水原府), 수원군(水原郡),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유수부(留守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관할지역도 그에 따라 확대 혹은 축소되었지만 역대로 지금 화성시의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부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원 관아(官衙)가 조선 1789년(정조 13) 팔달산 동쪽 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현재의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었다고 볼 때 김칠과 최승규는 지금 화성시 일대에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군사력을 갖춘 영향력 있는 호족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