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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전 종교] 혜거(惠居), 899년(신라 효공왕 3) ~ 974년(고려 광종 25)

카테고리
화성의 향토인물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99
혜거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로써 그의 행적은 994년(고려 성종 13) 최량(崔亮)이 쓴 혜거국사(惠居國師) 비문(碑文)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혜거국사 비문의 내용을 간추리고 다른 연구결과로 보충하여 혜거의 행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그의 이름은 박지회(朴智回)로써 황려현(黃驪縣)(현 경기도 여주, 신라 경덕왕 때부터 황효현(黃驍縣)으로 기천군(沂川郡) 속현이었다가 고려초에 천령군(川寧郡) 황려현으로 바뀜)에서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박윤형(朴允榮)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탑을 돌며 예불과 불경 듣기를 좋아하였는데, 16세(914년)에 출가하여 우두산(牛頭山) 개선사(開禪寺)에서 오심장로(悟心長老)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하고 수계(受戒)하면서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다. 3년 뒤 19세(917년) 때 금산사(金山寺) 의정율사(義靜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2년 뒤에는 미륵사(彌勒寺) 개탑 기념으로 열린 선운산(禪雲山) 선불장(選佛場)에서 설법하는 영광을 얻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 경애왕은 그에게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 것을 청하면서 많은 선물을 하사한 일이 있고, 31세(929년) 때 경순왕은 혜거를 영묘사(靈廟寺)로 불러 계단을 세우고 7일 동안 법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고려 왕조에 들어 혜거는 41세(939년)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 세 번이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다가 49세(947년) 때 왕사(王師)로 봉해짐과 더불어 개성에 올라와 정종(定宗)으로부터 징영각(澄瀛閣)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듬해(50세, 948년) 장단(長湍)에 있는 홍화사(弘化寺)에서 대장경 봉안식인 전장법사(轉臟法事)를 주관하자 왕은 혜거에게 ‘변지무애(辯智無碍)’라는 호를 내렸다. 63세(962년) 때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를 베풀었는데 그 노고로 광종이 또 ‘원명묘각(圓明妙覺)’이라는 호와 함께 선물을 내렸다. 6년 뒤 69세 때에는 역시 광종이 왕사를 국사(國師)로 승격시키면서 경운전(慶雲殿)에서 백좌회(百座會)를 베풀게 하는 한편 『원각경(圓覺經)』을 설법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국가의 기원 행사를 다수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2세(1970년, 광종21)때 그는 왕에게 수주부(水州府, 현재의 수원)에 있는 갈양사(葛陽寺)를 원찰로 삼기를 주청하였다. 갈양사가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교조였던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사찰이었다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다.(현재의 위치로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에 소재했던 갈양사는 그 후 언젠가 폐사되었다가, 그 자리에 1790년(정조 14) 용주사(龍珠寺)가 원찰로 새로이 지어졌다.) 그는 갈양사를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山明水麗 爲國家萬代福址)”이라 하였다. 이에 광종은 광명사(廣明寺) 주지 보욱(普昱)에게 명하여 절을 수리토록 하고 이듬해(971년) 가을 수리가 끝나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베풀게 하는 한편 태자를 보내 낙성을 행하도록 하였다. 수륙재(水陸齋) 혹은 수륙법회(水陸法會)라고도 하는 수륙도량은 혜거국사가 갈양사에서 실시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화성시 용주사 자리에 있던 갈양사와 혜거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74세(972년) 때 봄 혜거는 국사 자리에서 물러가기를 자주 청하여 왕이 허락하기에 이르렀고, 3월 15일 연복사(演福寺)에서 광종과 대신들의 환송연을 받은 다음 이튿날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진교(李鎭喬)의 배행을 받으면서 화산 갈양사로 내려왔다. 광종은 조 500석과 면포 60필, 차 100각과 기명(그릇)을 하사하고, 별도로 전결(田結) 500경(頃)의 토지를 주어 원찰의 재원으로 삼도록 하는 한편, ‘흥복우세(興福佑世)’라는 휘호를 주었다. 이후 참선을 중시하는 조계종풍(曹溪宗風)이 크게 떨쳤다고 한다. 갈양사로 내려온 혜거는 이 곳을 떠나지 않다가 974년(광종 25) 76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임종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나 역시 지금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고 사랑하거나 그리워하지 마라.(吾亦今將還源 爾曹勿悲勿愛戀)” 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고 한다. 3월 8일 화산 남쪽 기슭에서 다비하고 사리 13매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였다. 문인인 홍화사(弘化寺) 주지 숭담(嵩曇)과 광명사 주지 보욱(普昱), 그리고 대선백(大禪伯) 정관(淨觀)·대교석덕(大敎碩德) 충혜(忠惠) 등이 스승 혜거의 행장을 수집하여 왕에게 표를 올리니 ‘홍제존자(洪濟尊者)’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탑을 ‘보광(寶光)’이라 하였다.

혜거가 입적하고 20년이 지나 994년(성종 13) 왕은 하교하기를 “고 혜거국사는 두 왕조를 두루 섬겨 교화하고 다스리는 일을 은밀하게 도운 공이 이미 무성하고 넓은데도 오히려 비에 새겨 후세에 전하는 모범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내가 매우 개탄스럽게 여긴다.(故惠巨國師 歷事二朝 陰襄化理之功 旣茂而弘 尙缺勒碑垂后之典 予甚慨爲然)”라 하면서 혜거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태자소사(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太子少師) 최량(崔亮)이 비문을 짓고, 승봉랑상서도관낭중(承奉郞尙書都官郎中) 김후민(金厚民)이 서(書)와 전(篆)을 새기는 작업을 거쳐 갈양사에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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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거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작성일 22-06-08 09:34혜거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로써 그의 행적은 994년(고려 성종 13) 최량(崔亮)이 쓴 혜거국사(惠居國師) 비문(碑文)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혜거국사 비문의 내용을 간추리고 다른 연구결과로 보충하여 혜거의 행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그의 이름은 박지회(朴智回)로써 황려현(黃驪縣)(현 경기도 여주, 신라 경덕왕 때부터 황효현(黃驍縣)으로 기천군(沂川郡) 속현이었다가 고려초에 천령군(川寧郡) 황려현으로 바뀜)에서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박윤형(朴允榮)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탑을 돌며 예불과 불경 듣기를 좋아하였는데, 16세(914년)에 출가하여 우두산(牛頭山) 개선사(開禪寺)에서 오심장로(悟心長老)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하고 수계(受戒)하면서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다. 3년 뒤 19세(917년) 때 금산사(金山寺) 의정율사(義靜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2년 뒤에는 미륵사(彌勒寺) 개탑 기념으로 열린 선운산(禪雲山) 선불장(選佛場)에서 설법하는 영광을 얻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 경애왕은 그에게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 것을 청하면서 많은 선물을 하사한 일이 있고, 31세(929년) 때 경순왕은 혜거를 영묘사(靈廟寺)로 불러 계단을 세우고 7일 동안 법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고려 왕조에 들어 혜거는 41세(939년)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 세 번이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다가 49세(947년) 때 왕사(王師)로 봉해짐과 더불어 개성에 올라와 정종(定宗)으로부터 징영각(澄瀛閣)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듬해(50세, 948년) 장단(長湍)에 있는 홍화사(弘化寺)에서 대장경 봉안식인 전장법사(轉臟法事)를 주관하자 왕은 혜거에게 ‘변지무애(辯智無碍)’라는 호를 내렸다. 63세(962년) 때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를 베풀었는데 그 노고로 광종이 또 ‘원명묘각(圓明妙覺)’이라는 호와 함께 선물을 내렸다. 6년 뒤 69세 때에는 역시 광종이 왕사를 국사(國師)로 승격시키면서 경운전(慶雲殿)에서 백좌회(百座會)를 베풀게 하는 한편 『원각경(圓覺經)』을 설법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국가의 기원 행사를 다수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2세(1970년, 광종21)때 그는 왕에게 수주부(水州府, 현재의 수원)에 있는 갈양사(葛陽寺)를 원찰로 삼기를 주청하였다. 갈양사가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교조였던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사찰이었다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다.(현재의 위치로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에 소재했던 갈양사는 그 후 언젠가 폐사되었다가, 그 자리에 1790년(정조 14) 용주사(龍珠寺)가 원찰로 새로이 지어졌다.) 그는 갈양사를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山明水麗 爲國家萬代福址)”이라 하였다. 이에 광종은 광명사(廣明寺) 주지 보욱(普昱)에게 명하여 절을 수리토록 하고 이듬해(971년) 가을 수리가 끝나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베풀게 하는 한편 태자를 보내 낙성을 행하도록 하였다. 수륙재(水陸齋) 혹은 수륙법회(水陸法會)라고도 하는 수륙도량은 혜거국사가 갈양사에서 실시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화성시 용주사 자리에 있던 갈양사와 혜거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74세(972년) 때 봄 혜거는 국사 자리에서 물러가기를 자주 청하여 왕이 허락하기에 이르렀고, 3월 15일 연복사(演福寺)에서 광종과 대신들의 환송연을 받은 다음 이튿날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진교(李鎭喬)의 배행을 받으면서 화산 갈양사로 내려왔다. 광종은 조 500석과 면포 60필, 차 100각과 기명(그릇)을 하사하고, 별도로 전결(田結) 500경(頃)의 토지를 주어 원찰의 재원으로 삼도록 하는 한편, ‘흥복우세(興福佑世)’라는 휘호를 주었다. 이후 참선을 중시하는 조계종풍(曹溪宗風)이 크게 떨쳤다고 한다. 갈양사로 내려온 혜거는 이 곳을 떠나지 않다가 974년(광종 25) 76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임종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나 역시 지금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고 사랑하거나 그리워하지 마라.(吾亦今將還源 爾曹勿悲勿愛戀)” 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고 한다. 3월 8일 화산 남쪽 기슭에서 다비하고 사리 13매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였다. 문인인 홍화사(弘化寺) 주지 숭담(嵩曇)과 광명사 주지 보욱(普昱), 그리고 대선백(大禪伯) 정관(淨觀)·대교석덕(大敎碩德) 충혜(忠惠) 등이 스승 혜거의 행장을 수집하여 왕에게 표를 올리니 ‘홍제존자(洪濟尊者)’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탑을 ‘보광(寶光)’이라 하였다.

혜거가 입적하고 20년이 지나 994년(성종 13) 왕은 하교하기를 “고 혜거국사는 두 왕조를 두루 섬겨 교화하고 다스리는 일을 은밀하게 도운 공이 이미 무성하고 넓은데도 오히려 비에 새겨 후세에 전하는 모범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내가 매우 개탄스럽게 여긴다.(故惠巨國師 歷事二朝 陰襄化理之功 旣茂而弘 尙缺勒碑垂后之典 予甚慨爲然)”라 하면서 혜거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태자소사(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太子少師) 최량(崔亮)이 비문을 짓고, 승봉랑상서도관낭중(承奉郞尙書都官郎中) 김후민(金厚民)이 서(書)와 전(篆)을 새기는 작업을 거쳐 갈양사에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가 건립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