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부서 | 성명 | 소속 및 직위 | 담당 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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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준 위원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 |
박재형 위원 |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 학술·향토문화 분야 |
『남양지도(南陽地圖)』
카테고리
화성의 지리변화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20

남양지도』도 현존하는 남양지도 중 가장 상세한 지도이다. 지도의 위쪽이 동쪽으로 구도가 되어 있는데, 섬을 중시해 왔던 남양 지도의 전통이 이 지도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자세하게 적색선으로 그려진 도로는 선의 굵기의 차이로 그 크기를 나타냈다. 각 면의 이름 옆에 읍치로부터의 거리를 기록해 상대적인 거리를 표시하였다. 각 면에 표시된 사창(社倉)이 역시 고종대의 사정을 반영하며, ‘아사(衙舍)’ 남쪽 삼거리에 ‘읍장(邑場)’만 표현되고 19세기 전반 읍지에 보이던 다른 장시들의 이름은 표시되지 않아 폐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대부도를 비롯하여 주위의 14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부도에는 “대부도아(大阜島衙)”, “관방(關防)”이라 기록되어 있어,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 중시되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후 해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1871년 5월 25일에 대부도에 진을 세우고 진무영에 속하게 하였다가, 7월 20일에 혁파하였는데(備邊司謄錄, 권181, 고종 8년 5월 25일, 7월 20일), 이 시기에 지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남양지도(南陽地圖)』에는 육로는 매우 자세히 표시하였으나 해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이는『대부지도』를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단지 대부도와 마산진(馬山津) 사이의 바닷길을 표시하고, “밀물 때는 바다이나 썰물이 되면 뻘이 된다”라고 기재하고, 대부도와 선재도 사이의 바닷길에도 “배가 다니기도 하고, 뻘이 되기도 한다”라 표시함으로써 육지와 대부도, 선재도 사이에 퇴적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대부지도(大阜地圖)』는 대부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서울의 삼각산, 서쪽으로 덕적도, 동쪽으로 남양부, 남쪽으로 충청도 경계까지 그린 지도이다. 대부도는 마을까지 자세히 그렸으나, 주변 지역은 멀리 있는 지역을 끌어당겨 압축해 그렸으므로 중심부와 주변부의 축척이 달라 이원적(二元的) 축척(縮尺)이 적용된 지도이다.
주변의 섬들도 모두 그리고 소속을 밝혀 놓았는데, 승황도의 경우 “땅은 덕적도에 속하고, 사람은 남양에 속했는데, 새로 본도[대부도]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대부도에 진(鎭)을 설치함에 따른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풍도(楓島)와 입배도(入排島)에는 “서양선박이 정박했던 곳”이라 쓰여 있고 해로를 점선으로 표시해 놓아, 대부도 주변 해로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통로가 되었던 지역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