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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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2절 동탄면(東灘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440
제2절 동탄면(東灘面)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동북면은 부(府) 남쪽 20리에 있으며 502호(戶) 내에 1,4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면이었던 것 같다. 또한 1831년(순조 31)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어탄면은 부(府) 남쪽 30리에 있으며 12개 동이 있는데 장지촌(長芝村), 기곡(基谷), 산척(山尺)동, 이곡(梨谷), 송촌(松村), 평촌(平村), 신암(新庵), 방교(防橋), 암산(巖), 금곡(金谷) 등의 마을지명은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으며 동북면에도 22개 동이 있는데 오산(烏山)리, 목족(睦族)동, 농촌(農村)리, 만의(萬儀)동, 직동(直洞)리, 초목(草木)동, 내곡(內谷)리, 중촌(中村)리, 괴목정(槐木亭), 지사정(池沙井), 청계(淸溪)동, 영평야(永平野), 선납현(先納峴), 골마(骨馬)동, 화약(火藥)리, 소절(少節)리, 반송(盤松)리, 궁평(宮坪), 내촌(內村), 진구(陳舊)리, 송내촌(松內村), 묵실(墨室)리 등의 마을 지명은 현재도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동탄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 동북면과 어탄면을 합하여 동북면의 동(東)자와 어탄면의 탄(灘)을 따서 면명(面名)을 지었으며 최근 동탄면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면서 면세가 좁아졌다.
1. 금곡리(金谷里)〔소일, 쇠일〕

[사진-32. 금곡리의 옛모습(1978) ]
이 마을은 1831년에 간행된 『화성지』의 어탄면(漁灘面) 마을 편에 금곡(金谷)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필봉산(筆峰山) 줄기의 금반향(金盤鄕)이라는 기슭에 위치하여 이 지형이 명당이라는 설과 예전에 금이 많이 나와서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며 일부 마을은 오산시에 편입되었고 순 우리말로는 쇠실이라고 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소일로 많이 불리고 있다고 전한다.
○ 신암(新巖, 新菴)〔새암, 샘〕 : 필봉산 아래로 흐르는 한천(漢川)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섬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암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시암에서 다시 샘으로 불렸다고 한다.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신암(新巖)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 은개〔위개, 위포〕 : 소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오산천의 가에 있다.
○ 돌팍골 : 엄산 북쪽에 있으며 뒷산에 큰 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뱅골〔방곡(芳谷)〕 : 금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 원금곡 : 금곡리의 원 마을이다.
○ 멸안이〔명학(明鶴)〕 : 금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2. 목리(睦里)〔목족골, 목동〕
이 마을 역시 『화성지』 동북(東北)면 마을 편에 목족(睦族)동이 표기되어 지금의 목(睦)리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했으며, 목(睦)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으로 목족동(睦族洞) 혹은 목죽(睦竹)골이라 불렸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목(睦)리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 능동(陵洞)〔능말〕 : 목족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성죽동(盛竹洞)〔성죽골〕: 목족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3. 반송리(盤松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반송(盤松)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소나무로 만든 소반(小盤) 형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예전에 이 마을에 소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소나무로 소반을 많이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동탄면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동진(東津) : 예전에는 지금의 오산천을 한천(漢川)이라고 했는데 예전에 이 하천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고 하며 동쪽에 있는 나루터라 하여 한자로 동진(東津)으로 적었다고 한다.
○ 학동(鶴洞)〔학골, 해골〕 : 이 마을은 산세가 아름답고 산에 소나무가 많고 조용하여 예전에 학이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4. 방교리(防橋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방교(防橋)로 표기되어 있으며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신리(新里)천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방아다리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적으면서 방교(防橋)리가 되었다고 한다.
○ 원방교 : 방교리의 원 마을이다.
○ 이곡(梨谷) : 이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배(梨)밭이 많아서 이곡(梨谷)이란 마을지명이 붙여졌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오산천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船)가 이 마을까지 닿는 나루가 있었다 하여 배마루라고 불렸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는 이곡(梨谷)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고 추정된다.
○ 평촌(平村) : 왕산벌이라 부르는 넓은 들판 가운데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 했으며 한자로 평촌(平村)으로 적었다.
5. 산척리(山尺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산척동(山尺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 마을은 조선 중엽 임진왜란 당시에 전남 함평(咸平)에서 이 마을에 정착한 모(毛)씨의 집성촌으로 사방이 산으로 막혀 산이 많다고 하여 산텃골이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하여 산척골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산척리(山尺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 기곡동(基谷洞)〔텃골〕 : 산잣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6. 석우리(石隅里)

[사진-33. 석우리 항공사진 (2002) ]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묵실(墨室)· 능안· 돌머루· 서편(西便)말 등의 마을들을 병합하여 석우(石隅)리로 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큰 마을이며, 들판의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묵실(墨室) :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묵실(墨室)리로 표기되어 있는 마을로 마을의 생김새가 목수들의 도구인 묵통(墨)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은 나무가 많이 우거져 낮에도 어둡고 컴컴하다 하여 먹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 능(陵)안 : 이 마을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던 지관(地官) 한 사람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지형을 보고 경관이 아름답고 명당자리가 마을 안에 있다고 하며 임금의 능(陵)을 쓸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서편(西便)말 : 현재의 영천리(英川里)에 예전에 수원부(水原府)의 동북(東北)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이 마을은 면사무소의 서쪽에 마을이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진곡(泥谷) : 이 마을은 좌우에 깊은 산세가 있어 험난하기로 이름나 동학혁명 때 마을 앞에다 진(陣)을 쳤다고 하여 진구리라고 하였다는 설과 땅이 워낙 질어서 진(泥) 굴(谷)이라고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진구리(陳舊里)가 오늘날의 진곡으로 추정된다.
○ 옻골 : 석우리에 있는 마을로 옻샘이 있었다고 한다.
○ 설양계〔현량계〕 : 돌모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7. 송리(松里)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서 송리(松里)로 표기되어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이 삼태봉(三胎峰) 숲 속의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송내동(松內洞)이라 불렸으며 이 말이 변하여 송촌(松村) 혹은 송리(松里)로 불렸고 순 우리말로는 소라리라 불렸다고 전한다.
○ 내곡(內谷)〔안골〕 : 송촌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8. 신리(新里)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표기된 만의동(萬儀洞)과 직동(直洞) 두 마을을 관할하는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 적으며 신리(新里)가 되었다.
○ 만의(萬儀) : 이 마을은 험한 무봉산 기슭에 있어 임진왜란 당시에도 권율장군이 이끄는 의병들과 왜군이 이 마을 근방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많은 사람들이 만의산(무봉산) 골짜기로 피난하여 피해가 없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만의(萬儀)라 부르고 속명으로는 마내라 부른다고 마을에서는 전하는데 이 골짜기 안에 오래된 사찰의 이름이 만의사(萬儀寺)라 마을 이름도 만의가 되었다는 설도 전한다.
○ 직촌(直村)〔직동(直洞), 바른골, 바랑골〕 : 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인 승병(僧兵)을 양성할 때에 승병이 많아 병사의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으면 30리 이상이나 떨어진 오산천까지 뿌연 쌀뜨물이 흘렀다고 하여 바른골 혹은 바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풀무골 : 이 마을의 골짜기 안에 예전에 승병들의 병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다고 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9. 영천리(英川里)

[사진-34 영천3리 마을 전경(1978)]
이 마을은 『수원군읍지』와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표기된 영평야(永平野)가 지금의 영천리라고 추정되는데 이 마을주민들이 전하는 구전에는 이 마을 집성촌을 이루던 반남 박씨 가문에서 반남 선생이라는 특출한 영재(英才)가 태어났을 때 냇가에 있는 마을에서 영재가 났다하여 영천리(英川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 돌모루 : 이 마을이 위치한 곳이 오산천과 야동천이 합류하는 하류에 있어 홍수가 지면 상류로부터 돌(石)이 모이는 곳이란 뜻에서 돌모루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 선납재〔선납현(先納峴)〕 : 이 마을은 그 위치가 무봉산 만의사(萬儀寺)로 가는 길목이어서 각지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고매곡(古梅谷)〔골매골〕 : 선납재의 북동쪽에 있으며 기흥면 고매리 매골 남쪽 골짜기가 된다.
10. 오산리(梧山里)
이 마을 근방에는 명당자리가 있다는 주공산, 미륵산, 왕배산, 가마산, 마당산 등의 다섯뫼 다시 말하면 다섯 산이 변하여 5산(五山)에서 오산(梧山)으로 변했다는 설과 이 마을 부근에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오산(梧山)으로 불려졌다는 설과 면사무소가 있는 곳의 뒷산이 자라(鰲)를 닮아 오산(鰲山)이 되었다가 오산(梧山)으로 변하였다는 설 등이 전한다.
○ 미륵동(彌勒洞) : 이 마을 뒷산이 미륵산인데 산의 생김이 자라처럼 생겼으며 이 자라의 머리 위치에 미륵불이 서 있어서 미륵동 혹은 미륵뎅이 또는 미력동 등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지금도 산 입구에 미륵불이 남아있다.
○ 양지편 : 오미의 양지쪽 마을이다.
○ 음지편 : 오미의 음지쪽 마을이다.
11. 장지리(長芝里)
이 마을에는 용인과 경계를 이루는 석고개에서 발원하여 오산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마치 갈지(之)자 처럼 흐른다하여 장지천(長芝川)이라고 부르며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장지리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장지촌(長芝村)이 표기되어 있어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으로 추정된다.
○ 회촌(檜村)〔전나무골〕 :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예전에는 이 마을에 전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마을 이름을 전나무골로 부르고 한자로 적으면서 회촌(檜村)이 되었다고 전한다.
12. 중리(中里)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중촌리(中村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 구전되는 바에 의하면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고찰(古刹) 자리에 1312년(고려 충선왕 4년)에 천태종 수행도장이 생겨 전국 각지에서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중촌〔僧村〕이라 하다가 중(中)리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천태종의 수행도장 역시 곧 폐찰(廢刹)되었으며 스님들이 모였다면 중〔僧〕촌이 아니라 승촌(僧村)이 마땅하다고 믿기 때문에 이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 사거리〔사가리(四街里)〕 : 중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길이 네 갈래로 있다.
○ 새터말〔정촌말, 신촌〕 : 사거리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13. 청계리(淸溪里)
골매골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한천과 야곡으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야동천이 이 마을을 감싸고 흘러 맑은 계곡을 이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서는 청계동(淸溪洞)이 표기되어 있어 이 마을의 지명은 이미 조선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골청계골〔골말〕 : 청계골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 벌청계골〔아랫말〕 : 청계골 남서쪽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동북면은 부(府) 남쪽 20리에 있으며 502호(戶) 내에 1,4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면이었던 것 같다. 또한 1831년(순조 31)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어탄면은 부(府) 남쪽 30리에 있으며 12개 동이 있는데 장지촌(長芝村), 기곡(基谷), 산척(山尺)동, 이곡(梨谷), 송촌(松村), 평촌(平村), 신암(新庵), 방교(防橋), 암산(巖), 금곡(金谷) 등의 마을지명은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으며 동북면에도 22개 동이 있는데 오산(烏山)리, 목족(睦族)동, 농촌(農村)리, 만의(萬儀)동, 직동(直洞)리, 초목(草木)동, 내곡(內谷)리, 중촌(中村)리, 괴목정(槐木亭), 지사정(池沙井), 청계(淸溪)동, 영평야(永平野), 선납현(先納峴), 골마(骨馬)동, 화약(火藥)리, 소절(少節)리, 반송(盤松)리, 궁평(宮坪), 내촌(內村), 진구(陳舊)리, 송내촌(松內村), 묵실(墨室)리 등의 마을 지명은 현재도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동탄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 동북면과 어탄면을 합하여 동북면의 동(東)자와 어탄면의 탄(灘)을 따서 면명(面名)을 지었으며 최근 동탄면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면서 면세가 좁아졌다.
1. 금곡리(金谷里)〔소일, 쇠일〕

[사진-32. 금곡리의 옛모습(1978) ]
이 마을은 1831년에 간행된 『화성지』의 어탄면(漁灘面) 마을 편에 금곡(金谷)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필봉산(筆峰山) 줄기의 금반향(金盤鄕)이라는 기슭에 위치하여 이 지형이 명당이라는 설과 예전에 금이 많이 나와서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며 일부 마을은 오산시에 편입되었고 순 우리말로는 쇠실이라고 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소일로 많이 불리고 있다고 전한다.
○ 신암(新巖, 新菴)〔새암, 샘〕 : 필봉산 아래로 흐르는 한천(漢川)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섬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암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시암에서 다시 샘으로 불렸다고 한다.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신암(新巖)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 은개〔위개, 위포〕 : 소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오산천의 가에 있다.
○ 돌팍골 : 엄산 북쪽에 있으며 뒷산에 큰 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뱅골〔방곡(芳谷)〕 : 금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 원금곡 : 금곡리의 원 마을이다.
○ 멸안이〔명학(明鶴)〕 : 금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2. 목리(睦里)〔목족골, 목동〕
이 마을 역시 『화성지』 동북(東北)면 마을 편에 목족(睦族)동이 표기되어 지금의 목(睦)리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했으며, 목(睦)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으로 목족동(睦族洞) 혹은 목죽(睦竹)골이라 불렸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목(睦)리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 능동(陵洞)〔능말〕 : 목족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성죽동(盛竹洞)〔성죽골〕: 목족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3. 반송리(盤松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반송(盤松)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소나무로 만든 소반(小盤) 형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예전에 이 마을에 소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소나무로 소반을 많이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동탄면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동진(東津) : 예전에는 지금의 오산천을 한천(漢川)이라고 했는데 예전에 이 하천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고 하며 동쪽에 있는 나루터라 하여 한자로 동진(東津)으로 적었다고 한다.
○ 학동(鶴洞)〔학골, 해골〕 : 이 마을은 산세가 아름답고 산에 소나무가 많고 조용하여 예전에 학이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4. 방교리(防橋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방교(防橋)로 표기되어 있으며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신리(新里)천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방아다리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적으면서 방교(防橋)리가 되었다고 한다.
○ 원방교 : 방교리의 원 마을이다.
○ 이곡(梨谷) : 이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배(梨)밭이 많아서 이곡(梨谷)이란 마을지명이 붙여졌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오산천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船)가 이 마을까지 닿는 나루가 있었다 하여 배마루라고 불렸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는 이곡(梨谷)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고 추정된다.
○ 평촌(平村) : 왕산벌이라 부르는 넓은 들판 가운데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 했으며 한자로 평촌(平村)으로 적었다.
5. 산척리(山尺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산척동(山尺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 마을은 조선 중엽 임진왜란 당시에 전남 함평(咸平)에서 이 마을에 정착한 모(毛)씨의 집성촌으로 사방이 산으로 막혀 산이 많다고 하여 산텃골이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하여 산척골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산척리(山尺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 기곡동(基谷洞)〔텃골〕 : 산잣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6. 석우리(石隅里)

[사진-33. 석우리 항공사진 (2002) ]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묵실(墨室)· 능안· 돌머루· 서편(西便)말 등의 마을들을 병합하여 석우(石隅)리로 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큰 마을이며, 들판의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묵실(墨室) :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묵실(墨室)리로 표기되어 있는 마을로 마을의 생김새가 목수들의 도구인 묵통(墨)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은 나무가 많이 우거져 낮에도 어둡고 컴컴하다 하여 먹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 능(陵)안 : 이 마을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던 지관(地官) 한 사람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지형을 보고 경관이 아름답고 명당자리가 마을 안에 있다고 하며 임금의 능(陵)을 쓸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서편(西便)말 : 현재의 영천리(英川里)에 예전에 수원부(水原府)의 동북(東北)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이 마을은 면사무소의 서쪽에 마을이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진곡(泥谷) : 이 마을은 좌우에 깊은 산세가 있어 험난하기로 이름나 동학혁명 때 마을 앞에다 진(陣)을 쳤다고 하여 진구리라고 하였다는 설과 땅이 워낙 질어서 진(泥) 굴(谷)이라고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진구리(陳舊里)가 오늘날의 진곡으로 추정된다.
○ 옻골 : 석우리에 있는 마을로 옻샘이 있었다고 한다.
○ 설양계〔현량계〕 : 돌모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7. 송리(松里)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서 송리(松里)로 표기되어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이 삼태봉(三胎峰) 숲 속의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송내동(松內洞)이라 불렸으며 이 말이 변하여 송촌(松村) 혹은 송리(松里)로 불렸고 순 우리말로는 소라리라 불렸다고 전한다.
○ 내곡(內谷)〔안골〕 : 송촌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8. 신리(新里)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표기된 만의동(萬儀洞)과 직동(直洞) 두 마을을 관할하는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 적으며 신리(新里)가 되었다.
○ 만의(萬儀) : 이 마을은 험한 무봉산 기슭에 있어 임진왜란 당시에도 권율장군이 이끄는 의병들과 왜군이 이 마을 근방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많은 사람들이 만의산(무봉산) 골짜기로 피난하여 피해가 없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만의(萬儀)라 부르고 속명으로는 마내라 부른다고 마을에서는 전하는데 이 골짜기 안에 오래된 사찰의 이름이 만의사(萬儀寺)라 마을 이름도 만의가 되었다는 설도 전한다.
○ 직촌(直村)〔직동(直洞), 바른골, 바랑골〕 : 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인 승병(僧兵)을 양성할 때에 승병이 많아 병사의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으면 30리 이상이나 떨어진 오산천까지 뿌연 쌀뜨물이 흘렀다고 하여 바른골 혹은 바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풀무골 : 이 마을의 골짜기 안에 예전에 승병들의 병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다고 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9. 영천리(英川里)

[사진-34 영천3리 마을 전경(1978)]
이 마을은 『수원군읍지』와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 표기된 영평야(永平野)가 지금의 영천리라고 추정되는데 이 마을주민들이 전하는 구전에는 이 마을 집성촌을 이루던 반남 박씨 가문에서 반남 선생이라는 특출한 영재(英才)가 태어났을 때 냇가에 있는 마을에서 영재가 났다하여 영천리(英川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 돌모루 : 이 마을이 위치한 곳이 오산천과 야동천이 합류하는 하류에 있어 홍수가 지면 상류로부터 돌(石)이 모이는 곳이란 뜻에서 돌모루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 선납재〔선납현(先納峴)〕 : 이 마을은 그 위치가 무봉산 만의사(萬儀寺)로 가는 길목이어서 각지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고매곡(古梅谷)〔골매골〕 : 선납재의 북동쪽에 있으며 기흥면 고매리 매골 남쪽 골짜기가 된다.
10. 오산리(梧山里)
이 마을 근방에는 명당자리가 있다는 주공산, 미륵산, 왕배산, 가마산, 마당산 등의 다섯뫼 다시 말하면 다섯 산이 변하여 5산(五山)에서 오산(梧山)으로 변했다는 설과 이 마을 부근에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오산(梧山)으로 불려졌다는 설과 면사무소가 있는 곳의 뒷산이 자라(鰲)를 닮아 오산(鰲山)이 되었다가 오산(梧山)으로 변하였다는 설 등이 전한다.
○ 미륵동(彌勒洞) : 이 마을 뒷산이 미륵산인데 산의 생김이 자라처럼 생겼으며 이 자라의 머리 위치에 미륵불이 서 있어서 미륵동 혹은 미륵뎅이 또는 미력동 등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지금도 산 입구에 미륵불이 남아있다.
○ 양지편 : 오미의 양지쪽 마을이다.
○ 음지편 : 오미의 음지쪽 마을이다.
11. 장지리(長芝里)
이 마을에는 용인과 경계를 이루는 석고개에서 발원하여 오산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마치 갈지(之)자 처럼 흐른다하여 장지천(長芝川)이라고 부르며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장지리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어탄면 마을 편에 장지촌(長芝村)이 표기되어 있어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으로 추정된다.
○ 회촌(檜村)〔전나무골〕 :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예전에는 이 마을에 전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마을 이름을 전나무골로 부르고 한자로 적으면서 회촌(檜村)이 되었다고 전한다.
12. 중리(中里)
『화성지』 동북면 마을 편에 중촌리(中村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 구전되는 바에 의하면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고찰(古刹) 자리에 1312년(고려 충선왕 4년)에 천태종 수행도장이 생겨 전국 각지에서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중촌〔僧村〕이라 하다가 중(中)리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천태종의 수행도장 역시 곧 폐찰(廢刹)되었으며 스님들이 모였다면 중〔僧〕촌이 아니라 승촌(僧村)이 마땅하다고 믿기 때문에 이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 사거리〔사가리(四街里)〕 : 중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길이 네 갈래로 있다.
○ 새터말〔정촌말, 신촌〕 : 사거리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13. 청계리(淸溪里)
골매골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한천과 야곡으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야동천이 이 마을을 감싸고 흘러 맑은 계곡을 이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동북면 마을 편에서는 청계동(淸溪洞)이 표기되어 있어 이 마을의 지명은 이미 조선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골청계골〔골말〕 : 청계골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 벌청계골〔아랫말〕 : 청계골 남서쪽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