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마을이름 제14절 팔탄면(八灘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21
제14절 팔탄면(八灘面)
팔탄면은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부 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고 호수는 250호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1831년(순조 31)에 발간된 『화성지』 「방리」편에는 언창리(彦倉里), 전대리(箭帶里), 사천리(沙川里), 서촌리(西村里), 동촌리(東村里), 장지촌(長芝村), 동막(東幕), 노상리(路上里), 진월리(眞月里) 등 9개 동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현재 팔탄면에 있는 마을 지명과 같은 종류가 보인다. 팔탄면의 면지명은 발안천과 구창천의 흐름이 팔자형이라 1392년(태조 원년)부터 팔탄촌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저팔면(楮八面) 일부와 공향면(貢鄕面) 일부가 병합되어 팔탄면으로 편재되었다. 현재 화성시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면이다.
1. 가재리(佳才里)
조선시대 풍수지리가들이 이 마을의 지형이 아름답고 지덕이 많아 앞으로 수재(秀才)의 인물이 많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 가재울〔가재곡(佳才谷)〕 : 조선시대에 풍수전문가들이 이 마을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우며 풍수로 볼 때 지형이 큰 부자는 적어도 후손들이 번성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태어날 지형이라고 하여 가재곡(家才谷)으로 정하였으며 행정구역에서도 가재동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주로 가재울로 많이 불러왔다.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 산과 계곡에는 가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하고 있다.
○ 모사울〔모사곡(茅沙谷)〕 : 예전부터 이 마을의 산에 숲이 무성하고 계곡에 아름다운 고운 모래가 많아 모새울 또는 모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새터〔신기(新基). 신촌(新村)〕 :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누어진 2개의 마을이 있는데 동쪽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나(羅)씨, 정(鄭)씨, 백(白)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서쪽 마을에는 조선 말엽부터 황(黃)씨가 씨족을 형성하며 새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동쪽 마을에 비하여 새롭게 시작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화성지』 팔탄면 9개동에 서촌과 동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부터 두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고주리(古州里)〔고줏골〕
『화성지』에 의하면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까지 지금의 향남면(당시로는 공향면(貢鄕面)) 고주동(古州洞)이었다고 되어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팔탄면 고주리로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발안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며 논보다 밭이 많은 산간 마을로 예전부터 고추농사로 생업을 삼아 처음에는 고추골로 불리다가 고줏골, 고주동, 고주리로 되었다고 전한다.
3. 구장리(舊場里)
조선 말엽까지 장시(場市)가 있었으나 발안장이 생기면서 이 마을의 장시는 폐지되었고 그래서 예전의 장시가 열렸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마골〔마곡(馬谷)〕 : 이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말(馬)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조선 중엽부터 불려졌다고 전한다. ○ 벌말 : 구장천변의 넓은 벌판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벌말(坪村, 原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새터말〔신기촌(新基村), 민드르미〕 : 구장리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말엽부터 주민들이 새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서낭뎅이〔성황당(城隍堂)〕 : 발안을 거쳐 삼괴반도로 가는 길목에 숲이 무성하고 참나무가 있는 언덕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밤에 도깨비불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지나면서 여행길에 무사함을 빌면서 참나무 근처에 돌을 던져 성황당이 이루어졌고, 주민들은 이 고개를 서낭뎅이 또는 서낭댕이 등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 서촌(西村) : 구장리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장시가 열렸던 마을이며 장터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소동촌(小東村) : 장시가 열렸던 곳으로부터 동쪽의 작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이다.
○ 큰동촌(大東村) : 구 장터의 동쪽에 위치한 큰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소동촌에 비하여 큰 마을이다.
4. 기천리(箕川里)
건달산(乾達山) 아래쪽에 형성된 3개의 자연부락을 말하는데 이 마을들은 예전에 생활이 어려워 건달산에서 싸리나무를 베어다 키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골짜기의 모습이 흡사 키(箕)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윗사내〔상사천(上沙川)〕 : 건달산 아래 윗마을의 자연부락 이름은 윗사내, 아래쪽의 마을은 아랫사내로 불렸다고 전한다. 한편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사천리(沙川里)가 나오는데 사천(沙川)은 모래내의 뜻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쳐들어 올 때에 길이 막혀 오지 않아 큰 피해가 없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키울〔기곡(箕谷)〕 : 이 마을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싸리나무로 키를 만들어 생활했다는 설과 마을 뒷산의 골짜기들이 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5. 노하리(路下里)
『화성지』 팔탄면 편에 노상리(路上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행정구역이 노상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예전에 삼괴반도와 남양반도로 통하는 길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동막(東幕) :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동막(東幕)이라는 마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행정구역상으로 동막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예전에 이 마을에 농막(農幕)이 설치되어 있어 농막에서 동막으로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 안고잔〔내고잔(內古棧)〕 : 예전에 동막 저수지를 쌓기 전에는 서해의 바닷물이 이 마을까지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고잔은 고지(串)와 내(內)의 복합어로서 고지(串)안(내)에서 고잔으로, 다시 안고잔(內古棧)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6. 덕우리(德隅里)

[사진-100. 덕우리 마을 입구 표석과 전경]
1831년에 간행된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편에 덕구리(德九里)가 오늘날의 덕우리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 뒤에 천덕산이 있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의 구석(隅)에 마을이 위치하여 천덕산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안덕우리, 내덕우리 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 덕모루 : 덕우리와 덕천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천덕산의 줄기로 크게 둔적이 져 있으며 안덕모루와 바깥덕모루로 나뉘어 있다.
7. 덕천리(德泉里)
덕우리가 천덕산 안쪽에 위치하여 안덕우리로 불린 것과 반대로 이 마을은 천덕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밭덕우리, 외덕우리 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8. 매곡리(梅谷里)
마을의 뒷산인 등고산 기슭에 예전부터 매화(梅花) 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매화나무 골짜기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매곡리로 정해졌다.
○ 머리울〔두곡동(頭谷洞)〕 : 마을의 뒤를 감싸고 있는 산 이름이 청룡산(靑龍山)인데 그 산의 끝을 청룡뿌리라고 하며 마을의 생김새가 청룡의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9. 서근리(西近里)

[사진-101. 서근리 마을 전경]
작은 내가 있어서 서그내, 사근천, 서근촌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1906년 행정구역 조성시에는 서근촌(西斤村)이라 하여 공향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잔다리, 느락골 등을 병합하여 서근리라고 해서 팔탄면에 편입되었다.
○ 느락골〔느냥골, 느냥골〕: 서그내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잔다리 : 서그내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10. 월문리(月門里)
마을의 뒤로 천덕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옆으로는 등고산이 가로질러 있어 예전부터 달맞이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달문이로 불리었고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월문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1. 율암리(栗岩里)
글자 풀이처럼 예전부터 밤나무와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율리동(栗里洞)과 띄말· 입암동(立岩洞)을 병합하여 율리의 율자와 입암의 암자를 따서 율암리로 정하여 부르게 되었다.
○ 농막말〔농막촌(農幕村)〕 : 조선시대 무장인 이구래의 묘소를 마을의 산에 안장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해 농막과 묘막(墓幕)이 세워지면서 마을 이름도 농막말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 띄밭 : 마을 주변에 얕고 경사가 완만한 야산이 뻗어 있으며 그 서쪽으로 마을이 있고 예전부터 잔디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밤뒤 : 마을의 북쪽에 밤나무가 많아 율북(栗北)으로 불려오다가 그 후에 마을 앞(南)에도 밤나무가 많이 자생하게 되어 밤 뒤, 다시 말하면 밤나무가 많은 곳의 뒷동네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쇠뇌〔금천(金川)〕 : 남양과 삼괴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는 서해의 포구로 배가 많이 드나들어 어부와 상인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상업이 번성했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은 타지로 떠나야지 그대로 눌러 살면 재물이 쇠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이 마을이 상업이 성한 곳이란 뜻으로 금천(金川), 즉 쇠내라고 불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2. 지월리(芝月里)
『화성지』의 팔탄면 9개동 중에 진월리(眞月里)와 장지촌(長芝村)이 보이는데 이 두 마을이 오늘날의 지월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학산 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달(月)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에 장지미·서라리·진월·가장골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장지미(長芝村)의 지(芝)자와 진월(眞月)리의 월(月)자를 합쳐서 붙인 이름이다.
○ 북시기 : 예전에 이 마을에 나무로 불을 때서 옹기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어서 불시기 마을로 불려지다가 북시기로 전음되었고 이제는 주민들이 북재기 마을로 부르고 있다.
○ 장지미〔장김이(張金李)〕 : 조선시대 말엽 이 마을에는 장(張)씨·김(金)씨· 이(李)씨의 세 씨족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장김이 마을이라고 불려지다가 어느 새인가 장지미로 전화되었다고 전한다.
○ 잔다라니〔진월(眞月)〕 : 조선시대 말엽까지 마을 이름이 진월리(眞月里)였는데 마을 뒤의 산이 달의 형상을 똑같이 닮았다고 하여 잔다라니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한자로 진월리로 적었다고 전한다.
13. 창곡리(昌谷里)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언창리(彦倉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산골짜기마다 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었으며 마을이 번창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1914년 독곡동· 살띄· 언창동 등의 세 마을을 통합하여 언창의 창(昌)과 독곡의 곡(谷)자를 따서 창곡리로 정했다고 한다.
○ 독골〔독곡(獨谷)〕 : 조선시대 말엽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속에 외롭게 몇 집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서 외로운 마을이란 뜻의 독골로 불렸다고 전한다.
○ 살띄 : 예전에는 마을 입구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고기잡이 어살〔어전(漁箭)〕을 놓던 곳이라 해서 전대 또는 살띄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 언창(彦倉) : 쇠미산을 비롯한 여러 개의 산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창곡리에서는 가장 오래고 큰 마을이며 구전에 의하면 착하고 어진 선비가 살던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4. 하저리(下楮里)

[사진-102. 하저리 항공사진 ]
원래 조선시대 중엽까지 남양군 저팔리면(楮八里面)의 지역이었으며 마을 뒷산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안산동과 병합하여 하저리로 정해졌다고 전한다.
○ 상하저(上下楮) : 조선 말엽 남양군 저팔리면 저팔리였던 마을로 하저리 부락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상하저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안산동(安山洞) : 마을 주변이 얕고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하천 건너의 마을과 마주보면서 산을 등지고 마을이 또 있어서 다른 부락에서 바라보면 아늑한 산 속에 마을이 있어 편안한 산 속의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중하저(中下楮) : 하저리 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5. 해창리(海倉里)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 「창고」 편에 부 서쪽 공이향면(工以鄕面)에 해창(海倉)이 있다고 나오고 『화성지』에는 공향면의 창촌(倉村)이 나오는데 이 모두가 지금의 해창리와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시대 이 곳에 공이향(工以鄕)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수원부의 해창(海倉)이 있었다. 조선시대 말엽까지 서해를 통하여 서울인 한양까지 연결되는 해운(海運)이 빈번했던 곳으로 이 곳에는 양곡과 소금 등을 저장하던 해창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미래미〔삼암(三岩)〕 :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당산의 병풍바위, 심술산의 두꺼비바위, 꽃당산의 꽃바위 등 3개의 바위가 아름답고 유명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6. 화당리(花塘里)
『화성지』의 공향면 편에 화당촌(花堂村)이 보이는데 이 곳이 오늘날의 화당리로 생각된다. 이 마을 뒷산 일대에는 예전부터 진달래꽃을 비롯한 여러 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팔탄면은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부 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고 호수는 250호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1831년(순조 31)에 발간된 『화성지』 「방리」편에는 언창리(彦倉里), 전대리(箭帶里), 사천리(沙川里), 서촌리(西村里), 동촌리(東村里), 장지촌(長芝村), 동막(東幕), 노상리(路上里), 진월리(眞月里) 등 9개 동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현재 팔탄면에 있는 마을 지명과 같은 종류가 보인다. 팔탄면의 면지명은 발안천과 구창천의 흐름이 팔자형이라 1392년(태조 원년)부터 팔탄촌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저팔면(楮八面) 일부와 공향면(貢鄕面) 일부가 병합되어 팔탄면으로 편재되었다. 현재 화성시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면이다.
1. 가재리(佳才里)
조선시대 풍수지리가들이 이 마을의 지형이 아름답고 지덕이 많아 앞으로 수재(秀才)의 인물이 많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 가재울〔가재곡(佳才谷)〕 : 조선시대에 풍수전문가들이 이 마을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우며 풍수로 볼 때 지형이 큰 부자는 적어도 후손들이 번성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태어날 지형이라고 하여 가재곡(家才谷)으로 정하였으며 행정구역에서도 가재동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주로 가재울로 많이 불러왔다.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 산과 계곡에는 가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하고 있다.
○ 모사울〔모사곡(茅沙谷)〕 : 예전부터 이 마을의 산에 숲이 무성하고 계곡에 아름다운 고운 모래가 많아 모새울 또는 모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새터〔신기(新基). 신촌(新村)〕 :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누어진 2개의 마을이 있는데 동쪽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나(羅)씨, 정(鄭)씨, 백(白)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서쪽 마을에는 조선 말엽부터 황(黃)씨가 씨족을 형성하며 새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동쪽 마을에 비하여 새롭게 시작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화성지』 팔탄면 9개동에 서촌과 동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부터 두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고주리(古州里)〔고줏골〕
『화성지』에 의하면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까지 지금의 향남면(당시로는 공향면(貢鄕面)) 고주동(古州洞)이었다고 되어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팔탄면 고주리로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발안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며 논보다 밭이 많은 산간 마을로 예전부터 고추농사로 생업을 삼아 처음에는 고추골로 불리다가 고줏골, 고주동, 고주리로 되었다고 전한다.
3. 구장리(舊場里)
조선 말엽까지 장시(場市)가 있었으나 발안장이 생기면서 이 마을의 장시는 폐지되었고 그래서 예전의 장시가 열렸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마골〔마곡(馬谷)〕 : 이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말(馬)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조선 중엽부터 불려졌다고 전한다. ○ 벌말 : 구장천변의 넓은 벌판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벌말(坪村, 原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새터말〔신기촌(新基村), 민드르미〕 : 구장리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말엽부터 주민들이 새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서낭뎅이〔성황당(城隍堂)〕 : 발안을 거쳐 삼괴반도로 가는 길목에 숲이 무성하고 참나무가 있는 언덕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밤에 도깨비불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지나면서 여행길에 무사함을 빌면서 참나무 근처에 돌을 던져 성황당이 이루어졌고, 주민들은 이 고개를 서낭뎅이 또는 서낭댕이 등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 서촌(西村) : 구장리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장시가 열렸던 마을이며 장터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소동촌(小東村) : 장시가 열렸던 곳으로부터 동쪽의 작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이다.
○ 큰동촌(大東村) : 구 장터의 동쪽에 위치한 큰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소동촌에 비하여 큰 마을이다.
4. 기천리(箕川里)
건달산(乾達山) 아래쪽에 형성된 3개의 자연부락을 말하는데 이 마을들은 예전에 생활이 어려워 건달산에서 싸리나무를 베어다 키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골짜기의 모습이 흡사 키(箕)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윗사내〔상사천(上沙川)〕 : 건달산 아래 윗마을의 자연부락 이름은 윗사내, 아래쪽의 마을은 아랫사내로 불렸다고 전한다. 한편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사천리(沙川里)가 나오는데 사천(沙川)은 모래내의 뜻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쳐들어 올 때에 길이 막혀 오지 않아 큰 피해가 없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키울〔기곡(箕谷)〕 : 이 마을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싸리나무로 키를 만들어 생활했다는 설과 마을 뒷산의 골짜기들이 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5. 노하리(路下里)
『화성지』 팔탄면 편에 노상리(路上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행정구역이 노상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예전에 삼괴반도와 남양반도로 통하는 길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동막(東幕) :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동막(東幕)이라는 마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행정구역상으로 동막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예전에 이 마을에 농막(農幕)이 설치되어 있어 농막에서 동막으로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 안고잔〔내고잔(內古棧)〕 : 예전에 동막 저수지를 쌓기 전에는 서해의 바닷물이 이 마을까지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고잔은 고지(串)와 내(內)의 복합어로서 고지(串)안(내)에서 고잔으로, 다시 안고잔(內古棧)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6. 덕우리(德隅里)

[사진-100. 덕우리 마을 입구 표석과 전경]
1831년에 간행된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편에 덕구리(德九里)가 오늘날의 덕우리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 뒤에 천덕산이 있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의 구석(隅)에 마을이 위치하여 천덕산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안덕우리, 내덕우리 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 덕모루 : 덕우리와 덕천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천덕산의 줄기로 크게 둔적이 져 있으며 안덕모루와 바깥덕모루로 나뉘어 있다.
7. 덕천리(德泉里)
덕우리가 천덕산 안쪽에 위치하여 안덕우리로 불린 것과 반대로 이 마을은 천덕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밭덕우리, 외덕우리 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8. 매곡리(梅谷里)
마을의 뒷산인 등고산 기슭에 예전부터 매화(梅花) 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매화나무 골짜기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매곡리로 정해졌다.
○ 머리울〔두곡동(頭谷洞)〕 : 마을의 뒤를 감싸고 있는 산 이름이 청룡산(靑龍山)인데 그 산의 끝을 청룡뿌리라고 하며 마을의 생김새가 청룡의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9. 서근리(西近里)

[사진-101. 서근리 마을 전경]
작은 내가 있어서 서그내, 사근천, 서근촌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1906년 행정구역 조성시에는 서근촌(西斤村)이라 하여 공향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잔다리, 느락골 등을 병합하여 서근리라고 해서 팔탄면에 편입되었다.
○ 느락골〔느냥골, 느냥골〕: 서그내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잔다리 : 서그내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10. 월문리(月門里)
마을의 뒤로 천덕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옆으로는 등고산이 가로질러 있어 예전부터 달맞이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달문이로 불리었고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월문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1. 율암리(栗岩里)
글자 풀이처럼 예전부터 밤나무와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율리동(栗里洞)과 띄말· 입암동(立岩洞)을 병합하여 율리의 율자와 입암의 암자를 따서 율암리로 정하여 부르게 되었다.
○ 농막말〔농막촌(農幕村)〕 : 조선시대 무장인 이구래의 묘소를 마을의 산에 안장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해 농막과 묘막(墓幕)이 세워지면서 마을 이름도 농막말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 띄밭 : 마을 주변에 얕고 경사가 완만한 야산이 뻗어 있으며 그 서쪽으로 마을이 있고 예전부터 잔디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밤뒤 : 마을의 북쪽에 밤나무가 많아 율북(栗北)으로 불려오다가 그 후에 마을 앞(南)에도 밤나무가 많이 자생하게 되어 밤 뒤, 다시 말하면 밤나무가 많은 곳의 뒷동네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쇠뇌〔금천(金川)〕 : 남양과 삼괴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는 서해의 포구로 배가 많이 드나들어 어부와 상인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상업이 번성했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은 타지로 떠나야지 그대로 눌러 살면 재물이 쇠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이 마을이 상업이 성한 곳이란 뜻으로 금천(金川), 즉 쇠내라고 불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2. 지월리(芝月里)
『화성지』의 팔탄면 9개동 중에 진월리(眞月里)와 장지촌(長芝村)이 보이는데 이 두 마을이 오늘날의 지월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학산 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달(月)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에 장지미·서라리·진월·가장골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장지미(長芝村)의 지(芝)자와 진월(眞月)리의 월(月)자를 합쳐서 붙인 이름이다.
○ 북시기 : 예전에 이 마을에 나무로 불을 때서 옹기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어서 불시기 마을로 불려지다가 북시기로 전음되었고 이제는 주민들이 북재기 마을로 부르고 있다.
○ 장지미〔장김이(張金李)〕 : 조선시대 말엽 이 마을에는 장(張)씨·김(金)씨· 이(李)씨의 세 씨족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장김이 마을이라고 불려지다가 어느 새인가 장지미로 전화되었다고 전한다.
○ 잔다라니〔진월(眞月)〕 : 조선시대 말엽까지 마을 이름이 진월리(眞月里)였는데 마을 뒤의 산이 달의 형상을 똑같이 닮았다고 하여 잔다라니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한자로 진월리로 적었다고 전한다.
13. 창곡리(昌谷里)
『화성지』의 팔탄면 편에 언창리(彦倉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산골짜기마다 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었으며 마을이 번창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1914년 독곡동· 살띄· 언창동 등의 세 마을을 통합하여 언창의 창(昌)과 독곡의 곡(谷)자를 따서 창곡리로 정했다고 한다.
○ 독골〔독곡(獨谷)〕 : 조선시대 말엽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속에 외롭게 몇 집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서 외로운 마을이란 뜻의 독골로 불렸다고 전한다.
○ 살띄 : 예전에는 마을 입구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고기잡이 어살〔어전(漁箭)〕을 놓던 곳이라 해서 전대 또는 살띄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 언창(彦倉) : 쇠미산을 비롯한 여러 개의 산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창곡리에서는 가장 오래고 큰 마을이며 구전에 의하면 착하고 어진 선비가 살던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4. 하저리(下楮里)

[사진-102. 하저리 항공사진 ]
원래 조선시대 중엽까지 남양군 저팔리면(楮八里面)의 지역이었으며 마을 뒷산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안산동과 병합하여 하저리로 정해졌다고 전한다.
○ 상하저(上下楮) : 조선 말엽 남양군 저팔리면 저팔리였던 마을로 하저리 부락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상하저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안산동(安山洞) : 마을 주변이 얕고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하천 건너의 마을과 마주보면서 산을 등지고 마을이 또 있어서 다른 부락에서 바라보면 아늑한 산 속에 마을이 있어 편안한 산 속의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중하저(中下楮) : 하저리 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5. 해창리(海倉里)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 「창고」 편에 부 서쪽 공이향면(工以鄕面)에 해창(海倉)이 있다고 나오고 『화성지』에는 공향면의 창촌(倉村)이 나오는데 이 모두가 지금의 해창리와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시대 이 곳에 공이향(工以鄕)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수원부의 해창(海倉)이 있었다. 조선시대 말엽까지 서해를 통하여 서울인 한양까지 연결되는 해운(海運)이 빈번했던 곳으로 이 곳에는 양곡과 소금 등을 저장하던 해창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미래미〔삼암(三岩)〕 :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당산의 병풍바위, 심술산의 두꺼비바위, 꽃당산의 꽃바위 등 3개의 바위가 아름답고 유명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6. 화당리(花塘里)
『화성지』의 공향면 편에 화당촌(花堂村)이 보이는데 이 곳이 오늘날의 화당리로 생각된다. 이 마을 뒷산 일대에는 예전부터 진달래꽃을 비롯한 여러 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