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마을이름 제15절 향남면(鄕南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43
제15절 향남면(鄕南面)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보이는 남면(南面), 공향면(貢鄕面)과 1899년에 발간된 『남양군읍지』의 분향리면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어 형성된 면이다. 『화성지』에 의하면 남면에는 요동리(料洞里), 백토동(白土洞), 두기리(斗里), 상두리(上斗里), 내동리(內洞里), 화리현리(禾里峴里), 하두리(下斗里), 서송리(西松里), 증거리(曾巨里), 갈천동(葛川洞), 오실리(室里), 삼미성(三美城) 등 12개 동이 있었다. 공향면(貢鄕面)은 예전에는 공이향(工以鄕)으로 불리었고 옛 서북면(西北面)이 지금은 여기에 합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창촌(倉村), 매산리(梅山里), 화당촌(花堂村), 공장촌(工長村), 각곡리(角谷里), 덕구리(德九里), 고죽동(孤竹洞), 갈곡리(葛谷里), 고주동(古州洞), 한절리(寒節里), 방축리(防築里), 중촌리(仲村里), 도이동(桃李洞), 한천동(寒泉洞), 복촌리(福村里), 정촌(亭村) 등의 마을 이름이 보이고 있다. 또한 분향리면(分鄕里面)은 남양부의 관문에서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있으며 석천동(石川洞)·안길리(安吉洞)·구밀동(求密洞)·문언동(文彦洞)·신동(新洞)·상동(上洞)·하동(下洞) 등으로 편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 갈천리(葛川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편에 갈곡리(葛谷里)가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갈천리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칡(葛)이 유난히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또한 이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하천 역시 갈천(葛川)이라 불리고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갈천리로 정하였으며 속명으로 가래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흉년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할 때에도 많은 주민들이 칡을 캐어 연명을 하였으며 월궁사(月宮寺)라는 절의 스님이 이러한 사실을 인근 마을주민들에게도 알려주어 오랜 흉년에도 인근 주민들이 이 곳으로 칡을 많이 캐러 와서 연명을 하였다고 전한다.
2. 관리(官里)
예전에 향남면이 공향면이던 시기에 이 곳에 면사무소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원래는 마을 앞에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귀골·귀곡·구곡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새터말과 합하여 관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주민들 사이에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 초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여 이에 반대하는 여러 신하들의 삼족을 멸할 때에 높은 벼슬을 하던 고관 한 사람이 신분을 숨기고 몰래 낙향하여 이 마을에 숨어살게 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사는 동네라 해서 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귀골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 설도 전한다.
○ 뱀뿌리 : 관리 마을 뒷산의 동쪽 끝의 기슭을 말하는데 예전부터 이 곳을 건드리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하였다고 마을의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려면 뱀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 새터말〔신촌(新村)〕 : 귀골 부근에 마을이 새로 형성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여 새터말, 한자로는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3. 구문천리(求文川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구밀(求蜜)· 문언(文彦)· 석천(石川) 등의 세 마을을 병합하여 세 마을의 첫 자를 따서 구문천리(求文川里)로 정한 것이다.
○ 구밀(求蜜)〔구미리〕 : 원래는 문언동의 일부였으나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마을에 아주 심한 흉년이 든 어느 해 병이 든 노승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렸다가 쓰러져 신음하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꿀(蜜)을 구하여 정성껏 간호하여 병이 완쾌되어 마을을 떠나며 마을 이름을 구밀(求蜜)이라고 해야 마을도 번성하고 잘 살게 된다고 하여 그때부터 그렇게 불려졌다고 전한다.
○ 문언동(文彦洞)〔물언이〕 : 조선시대 말엽 이 마을에 서당(書堂)이 있어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고 하여 인근 부락에서 문언동(文彦洞)이라고 불렀으며 우리말로는 문언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 석천(石川)〔돌내〕 : 냇가에 돌이 많이 깔렸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 앞에 큰 돌에서 물이 솟아 이 곳을 돌우물이라 했는데 이 돌우물에서 솟은 물이 흘러 내(川)를 이루게 되어 이 냇물을 돌내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석천(石川)이라고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 절골〔사곡(寺谷)〕 : 구밀 부락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당아랫골 : 절골의 서남쪽의 마을로 예전에 마을 뒷산에 당집이 있어서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4. 길성리(吉城里)
마을 뒤에 삼성산(三城山)이 있는데 그 산에 옛 백제시대의 성이 있다고 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마을에서는 사미재라고 부른다.
○ 댓골〔죽곡(竹谷)〕 :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고죽동(孤竹洞)으로 표기된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부터 이 마을에 대나무(竹)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5. 도이리(桃李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도이동(桃李洞)으로 표기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이 확실하다. 예전부터 이 마을에 복숭아나무, 오얏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낫머리· 구억말· 돌모렝이 등의 부락을 병합하여 도이리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개내(開內)벌 : 예전에는 이 곳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던 곳이며 갯벌이 질펀한 곳으로 바다로 앞이 열린(開) 안쪽(내)이라는 뜻에서 개내벌이라 했으며 한편 마을주민들은 벌떠구니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 구억(九億)말 : 마을에서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 이 마을에 벼농사를 구억석(九億石)이나 할 정도로 진사 벼슬의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이것은 와전된 이야기이기고 구석이란 뜻에서 변하여 구석말로 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마을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을 피해골이라 부르는데 이 뜻은 도둑이 하도 많이 들어 다른 마을로 피해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겸두리(鎌頭里)〔낫머리〕 : 마을 주위를 감싸고 있는 뒷산의 모습이 흡사 낫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 우리말로는 낫머리로 불렸다.
○ 석우리(石隅里)〔돌모랭이〕 : 옛날에는 삼미촌(三尾村)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이 마을이 공향면(貢鄕面)·남면(南面)· 봉담면(峰潭面)의 3개 면 끝머리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화성지』의 남면(南面) 마을 편에 삼미성(三美城)이 표기된 것이 당시의 이 마을 이름으로 추측되는데 근래에는 돌산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돌모랭이라고 부르며 한자로 적으면서 석우리로 되었다.
○ 자치동(雌雉洞)〔자치울〕 : 예전에 처음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짓지 못하였는데 인근에 유명한 지관(地官)에게 마을명을 부탁하니 지관이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이 마을은 꿩(雉)이 알을 품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자치울이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자로 적으면서 자치동(雌雉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6. 동오리(東梧里)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오리(東梧里)라고 해서 남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남면이 향남면으로 편제됨에 따라 향남면에 편입되었다.
7.발안리(發安里)

[사진-103. 발안리 시가지 전경(1990) ]
아주 오래 전에 이 마을은 서해의 물이 들어와 갯벌이었으며 갯벌 안쪽에 있다고 하여 벌의 안이라는 뜻으로 벌안이라고 부르던 것이 발안으로 변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쓰면서 발안(發安)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 짐대울 : 예전에는 이 곳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서 배에 실은 짐을 내리고 싣고 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짐대울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8. 방축리(防築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방축리(防築里)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이라고 추정된다. 이 마을 앞에는 아래위로 길게 이어지는 방축이 있어 방축머리라는 뜻이 방죽머리로 변하여 불려졌으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방축리(防築里)가 되었다.
○ 죽전동(竹田洞) :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잣집 몇 집이 모여 살면서 대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온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덮이게 되었는데 서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하여 성(城)을 쌓게 되면서부터 대나무도 점차 말라죽고 부자들도 망하게 되어 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인근 부락에서 이 마을을 대밭말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한우물 : 마을 앞에 샘이 많이 솟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샘이 하도 많이 솟아 얼마나 솟나 보려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한 우물 가득하였다고 해서 마을에서는 이 우물을 한우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9. 백토리(白土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백토(白土)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남면에 속했다고 추정되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향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뒷산에 하얀 흙(白土)이 많다고 하여 백토골이라 했으며 한자로 백토(白土)리로 적었다.
○ 두물 : 예전에 이 마을 위쪽에 천연적으로 생긴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여 두몰로 불렸고 또는 두모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 애내〔내촌(內村), 신기(新基)〕 : 예전 이 마을의 냇가 옆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에서 어떤 과부가 애를 낳았다고 하여 애가 태어난 냇가라고 해서 애내가 되었다는 설과 마을이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촌(內村)으로도 불렸으며, 백토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기(新基)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환두(環斗)골 : 이 마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둥글게 둘려 있으며 마치 문고리의 손잡이 모양처럼 둥글고, 혹은 곡식을 세는 말(斗)처럼 둥글다 하여 환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남면에 두기리(斗햙里)라고 표기된 곳이 이 마을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10. 상두리(上斗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상두(上斗)리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 마을은 원래 수원부(水原府)의 남면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향남면 상두리가 되었다. 마을 뒷산의 모습이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고 마을이 그 용의 머리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원래는 용두리(龍頭里)라 해야 하나 머리 두(頭)대신에 말 두(斗)자를 써서 두리(斗里)라 불렀고 마을이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어 윗마을을 상두리 아랫마을을 하두리라고 하였으며 우리말로는 웃두머리 아랫두머리라고 한다고 전한다.
11. 상신리(上新里)

[사진-104. 상신5리 칼바위마을(2000) ]
분향면(汾鄕面) 시절에 상동(上洞)과 신동(新洞)이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병합하면서 상동의 상자와 신동의 신자를 따서 상신리로 정하고 그 때부터 상신리로 불려졌다.
○ 금곡동(琴谷洞) : 고려시대에는 금음촌처(今音村處)라 하여 옹기를 주로 취급하는 점포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고 전한다. 주민들이 옹기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드는 일 등을 하면서 부지런하면서도 겸손하고 인정 많은 생활을 한다고 하여 검정골(儉谷)이라고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금곡동(琴谷洞)이라 정하여 지금까지 불려져 왔다고 전한다,
○ 평촌(坪村) : 조선시대 말엽부터 부지런한 이 마을 주민들은 본래 갯벌이었던 곳을 개척하여 농지로 만들었고 근방에 사람들이 모여 집이 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벌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해서 벌말이라 부르고 한자로 평촌(坪村)으로 적었다.
○ 분향(汾鄕) : 이 마을 남쪽에 칼처럼 생긴 돌산이 있어 칼바위 돌산이라고 하고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돌분양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분향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 손포(孫浦) : 예전에는 마을 바로 앞까지 서해의 갯벌이 펼쳐져 있었으며 이 때에 이 마을에 손(孫)씨가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여 손씨가 모여 사는 갯벌마을이라는 뜻에서 손개라고 하고 한자로 손포(孫浦)라고 적었다.
12. 송곡리(松谷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의 송산리(松山里)와 관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뒷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소나무골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길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곡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13. 수직리(水直里)
이 마을 안에는 샘이 많이 나는 우물이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가 항상 물이 많으며 곧게 흐른다는 뜻에서 수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내의 윗 쪽의 마을을 상수직(上水直), 아래쪽의 마을을 하수직이라고 부르며 우리말로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우뭇골로 불려지고 있다.
○ 부처내 : 황구지천과 갈천이 만나는 곳의 일대를 말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 조마전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하여 주민들에게도 베풀 줄을 모르고 인정이 없는 부자로 어느 날 인근에 있는 절의 스님이 시주를 부탁하자 쌀이 없다는 말과 함께 쇠똥을 담아주며 조롱하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이 집안의 착한 며느리가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스님에게 사죄하며 쇠똥을 쏟아버리고 대신 쌀을 시주하였더니 그 스님께서 며느리에게 급하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곧장 나를 따라오되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리하여 며느리가 스님의 뒤를 따라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되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니 스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도 잊고 며느리가 집을 향하여 돌아보니 부잣집은 흔적도 없어지고 며느리는 그 자리에 돌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와 같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 마을 앞에는 돌부처가 남아 있다.
14. 증거리(增巨里)
『화성지』 남면의 마을 편에 증거리(曾巨里)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남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마을이 더욱 번성하여 큰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증거리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원래의 마을 이름은 진개울 혹은 진계울이라 하여 큰 개울(황구지천)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연유한다고 추정된다.
○ 진개울〔진개원(溪苑)〕 :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큰 개울이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에서 진개울(溪苑)이라 불렸다가 증거울(增巨谷), 다시 진개울로 전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15. 요리(料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요동리(料洞里)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불려진 마을 이름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갈대(蓼)가 많아 요리(蓼里)로 불려지던 것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현재의 요리(料里)로 바꾸어 불렀으며 지금도 자연 부락 이름으로 요골이 널리 불려진다.
16. 제암리(堤岩里)

[사진-105. 제암리 마을 전경(1990) ]
팔탄면의 고주리(古州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제방(堤防)과 논두렁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두렁바위라고도 불렸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넘말(너머 마을), 곡구래미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한자로 적으며 제암리라고 했다. 이 마을은 3·1운동 당시의 일경의 만행으로 제암교회에 교인과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불을 지른 3·1운동순국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17. 평리(評里)
예전부터 이 마을 앞으로 평야(발안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넓은 벌판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벌말로도 불렸다.
18. 하길리(下吉里)
조선시대 말기에는 남양군 분향면(分鄕面)의 지역으로 있었으며 당시 면소재지 아래쪽의 안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금의 향남면으로 편입되면서 하길리라고 붙여졌다고 전한다. ○ 마곡(麻谷) :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 뒷산에 마곡사(麻谷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마침내 절은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마곡사란 절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남아 있으며 마골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사창(社倉) : 『화성지』의 공향면 마을 편에 수록된 창동(倉洞)이라는 명칭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창이라는 이름에서 이 마을이 창고와 연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창(社倉)의 사(社)는 원래 민가가 여럿 모여 한 부락을 이룬다는 뜻이며 창(倉)은 창고(倉庫)의 의미로서 조선시대 나라에서 가뭄, 홍수 등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에 주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환곡(還穀)을 저장해 두던 고을의 곳집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매년 풍년이 들어 날로 번창 할 때에 어느 고승(高僧) 한 분이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려 마을이 더욱 잘 살게 되고 계속 풍년이 들어 남아도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창고를 많이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하나 전자의 연유가 옳은 유래로 보인다.
○ 안길(安吉) : 이 마을은 예전부터 홍수나 가뭄, 전염병이 창궐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이 안전하고 길(吉)한 마을이 되어 달라는 기원의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우리말로는 안길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창덕골〔창덕곡(倉(昌)德谷)〕 : 사창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한 도승(道僧)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 마을은 나무가 무성해야 큰 덕을 본다고 예언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 행정리(杏亭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정촌(亭村)이 표기되어 있어 오래 전부터 정자가 있는 마을로 불려졌다고 추정한다. 1914년 일제의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행정(上杏亭), 하행정, 분촌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행정리라고 정하였다. 이 마을 주변에는 예전부터 은행나무가 많고 곳곳에 마을 주민과 노인들의 쉼터인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우리말로 은행정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한다.
○ 분촌(分村) : 본래 이곳을 세면〔서면(西面)〕이라고 불렀는데 이 세면에서 분리되어 나눈다는 뜻의 분촌(分村)으로 다시 변하여 분비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 세면〔서면(西面)〕 : 조선시대에 수원부(水原府)의 서면(西面) 면소재지가 이 마을에 있어 서면에서 세면으로 변화되어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20. 화리현리(禾里峴里)
『화성지』의 남면의 마을 편에 화리현(禾里峴)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는 수원부(水原府)의 남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양석골(兩石谷)을 합하여 화리현리라고 정하고 지금의 향남면에 포함시켰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토질이 좋고 주민들도 농사짓기에 부지런하여 벼도 다른 마을보다 두 배나 더 생산된다는 뜻에서 양석(兩石)이라고 불렸다고 하며 또한 고개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 수리재 : 예전부터 샘물이 풍부하고 고개가 많고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의 고개에 수리(독수리)가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양석골〔양석곡(兩石谷)〕 : 이 마을은 예전부터 샘물이 풍부하고 마을 주민들도 농사짓기에 부지런하여 가뭄이 들어도 벼농사가 잘되어 양석의 생산을 거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보이는 남면(南面), 공향면(貢鄕面)과 1899년에 발간된 『남양군읍지』의 분향리면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어 형성된 면이다. 『화성지』에 의하면 남면에는 요동리(料洞里), 백토동(白土洞), 두기리(斗里), 상두리(上斗里), 내동리(內洞里), 화리현리(禾里峴里), 하두리(下斗里), 서송리(西松里), 증거리(曾巨里), 갈천동(葛川洞), 오실리(室里), 삼미성(三美城) 등 12개 동이 있었다. 공향면(貢鄕面)은 예전에는 공이향(工以鄕)으로 불리었고 옛 서북면(西北面)이 지금은 여기에 합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창촌(倉村), 매산리(梅山里), 화당촌(花堂村), 공장촌(工長村), 각곡리(角谷里), 덕구리(德九里), 고죽동(孤竹洞), 갈곡리(葛谷里), 고주동(古州洞), 한절리(寒節里), 방축리(防築里), 중촌리(仲村里), 도이동(桃李洞), 한천동(寒泉洞), 복촌리(福村里), 정촌(亭村) 등의 마을 이름이 보이고 있다. 또한 분향리면(分鄕里面)은 남양부의 관문에서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있으며 석천동(石川洞)·안길리(安吉洞)·구밀동(求密洞)·문언동(文彦洞)·신동(新洞)·상동(上洞)·하동(下洞) 등으로 편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 갈천리(葛川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편에 갈곡리(葛谷里)가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갈천리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칡(葛)이 유난히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또한 이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하천 역시 갈천(葛川)이라 불리고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갈천리로 정하였으며 속명으로 가래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흉년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할 때에도 많은 주민들이 칡을 캐어 연명을 하였으며 월궁사(月宮寺)라는 절의 스님이 이러한 사실을 인근 마을주민들에게도 알려주어 오랜 흉년에도 인근 주민들이 이 곳으로 칡을 많이 캐러 와서 연명을 하였다고 전한다.
2. 관리(官里)
예전에 향남면이 공향면이던 시기에 이 곳에 면사무소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원래는 마을 앞에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귀골·귀곡·구곡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새터말과 합하여 관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주민들 사이에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 초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여 이에 반대하는 여러 신하들의 삼족을 멸할 때에 높은 벼슬을 하던 고관 한 사람이 신분을 숨기고 몰래 낙향하여 이 마을에 숨어살게 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사는 동네라 해서 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귀골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 설도 전한다.
○ 뱀뿌리 : 관리 마을 뒷산의 동쪽 끝의 기슭을 말하는데 예전부터 이 곳을 건드리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하였다고 마을의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려면 뱀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 새터말〔신촌(新村)〕 : 귀골 부근에 마을이 새로 형성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여 새터말, 한자로는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3. 구문천리(求文川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구밀(求蜜)· 문언(文彦)· 석천(石川) 등의 세 마을을 병합하여 세 마을의 첫 자를 따서 구문천리(求文川里)로 정한 것이다.
○ 구밀(求蜜)〔구미리〕 : 원래는 문언동의 일부였으나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마을에 아주 심한 흉년이 든 어느 해 병이 든 노승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렸다가 쓰러져 신음하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꿀(蜜)을 구하여 정성껏 간호하여 병이 완쾌되어 마을을 떠나며 마을 이름을 구밀(求蜜)이라고 해야 마을도 번성하고 잘 살게 된다고 하여 그때부터 그렇게 불려졌다고 전한다.
○ 문언동(文彦洞)〔물언이〕 : 조선시대 말엽 이 마을에 서당(書堂)이 있어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고 하여 인근 부락에서 문언동(文彦洞)이라고 불렀으며 우리말로는 문언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 석천(石川)〔돌내〕 : 냇가에 돌이 많이 깔렸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 앞에 큰 돌에서 물이 솟아 이 곳을 돌우물이라 했는데 이 돌우물에서 솟은 물이 흘러 내(川)를 이루게 되어 이 냇물을 돌내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석천(石川)이라고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 절골〔사곡(寺谷)〕 : 구밀 부락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당아랫골 : 절골의 서남쪽의 마을로 예전에 마을 뒷산에 당집이 있어서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4. 길성리(吉城里)
마을 뒤에 삼성산(三城山)이 있는데 그 산에 옛 백제시대의 성이 있다고 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마을에서는 사미재라고 부른다.
○ 댓골〔죽곡(竹谷)〕 :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고죽동(孤竹洞)으로 표기된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부터 이 마을에 대나무(竹)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5. 도이리(桃李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도이동(桃李洞)으로 표기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지명이 확실하다. 예전부터 이 마을에 복숭아나무, 오얏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낫머리· 구억말· 돌모렝이 등의 부락을 병합하여 도이리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개내(開內)벌 : 예전에는 이 곳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던 곳이며 갯벌이 질펀한 곳으로 바다로 앞이 열린(開) 안쪽(내)이라는 뜻에서 개내벌이라 했으며 한편 마을주민들은 벌떠구니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 구억(九億)말 : 마을에서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 이 마을에 벼농사를 구억석(九億石)이나 할 정도로 진사 벼슬의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이것은 와전된 이야기이기고 구석이란 뜻에서 변하여 구석말로 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마을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을 피해골이라 부르는데 이 뜻은 도둑이 하도 많이 들어 다른 마을로 피해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겸두리(鎌頭里)〔낫머리〕 : 마을 주위를 감싸고 있는 뒷산의 모습이 흡사 낫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 우리말로는 낫머리로 불렸다.
○ 석우리(石隅里)〔돌모랭이〕 : 옛날에는 삼미촌(三尾村)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이 마을이 공향면(貢鄕面)·남면(南面)· 봉담면(峰潭面)의 3개 면 끝머리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화성지』의 남면(南面) 마을 편에 삼미성(三美城)이 표기된 것이 당시의 이 마을 이름으로 추측되는데 근래에는 돌산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돌모랭이라고 부르며 한자로 적으면서 석우리로 되었다.
○ 자치동(雌雉洞)〔자치울〕 : 예전에 처음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짓지 못하였는데 인근에 유명한 지관(地官)에게 마을명을 부탁하니 지관이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이 마을은 꿩(雉)이 알을 품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자치울이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자로 적으면서 자치동(雌雉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6. 동오리(東梧里)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오리(東梧里)라고 해서 남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남면이 향남면으로 편제됨에 따라 향남면에 편입되었다.
7.발안리(發安里)

[사진-103. 발안리 시가지 전경(1990) ]
아주 오래 전에 이 마을은 서해의 물이 들어와 갯벌이었으며 갯벌 안쪽에 있다고 하여 벌의 안이라는 뜻으로 벌안이라고 부르던 것이 발안으로 변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쓰면서 발안(發安)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 짐대울 : 예전에는 이 곳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서 배에 실은 짐을 내리고 싣고 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짐대울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8. 방축리(防築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방축리(防築里)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이라고 추정된다. 이 마을 앞에는 아래위로 길게 이어지는 방축이 있어 방축머리라는 뜻이 방죽머리로 변하여 불려졌으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방축리(防築里)가 되었다.
○ 죽전동(竹田洞) :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잣집 몇 집이 모여 살면서 대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온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덮이게 되었는데 서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하여 성(城)을 쌓게 되면서부터 대나무도 점차 말라죽고 부자들도 망하게 되어 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인근 부락에서 이 마을을 대밭말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한우물 : 마을 앞에 샘이 많이 솟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샘이 하도 많이 솟아 얼마나 솟나 보려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한 우물 가득하였다고 해서 마을에서는 이 우물을 한우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9. 백토리(白土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백토(白土)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남면에 속했다고 추정되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향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뒷산에 하얀 흙(白土)이 많다고 하여 백토골이라 했으며 한자로 백토(白土)리로 적었다.
○ 두물 : 예전에 이 마을 위쪽에 천연적으로 생긴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여 두몰로 불렸고 또는 두모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 애내〔내촌(內村), 신기(新基)〕 : 예전 이 마을의 냇가 옆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에서 어떤 과부가 애를 낳았다고 하여 애가 태어난 냇가라고 해서 애내가 되었다는 설과 마을이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촌(內村)으로도 불렸으며, 백토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기(新基)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환두(環斗)골 : 이 마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둥글게 둘려 있으며 마치 문고리의 손잡이 모양처럼 둥글고, 혹은 곡식을 세는 말(斗)처럼 둥글다 하여 환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의 남면에 두기리(斗햙里)라고 표기된 곳이 이 마을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10. 상두리(上斗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상두(上斗)리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 마을은 원래 수원부(水原府)의 남면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향남면 상두리가 되었다. 마을 뒷산의 모습이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고 마을이 그 용의 머리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원래는 용두리(龍頭里)라 해야 하나 머리 두(頭)대신에 말 두(斗)자를 써서 두리(斗里)라 불렀고 마을이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어 윗마을을 상두리 아랫마을을 하두리라고 하였으며 우리말로는 웃두머리 아랫두머리라고 한다고 전한다.
11. 상신리(上新里)

[사진-104. 상신5리 칼바위마을(2000) ]
분향면(汾鄕面) 시절에 상동(上洞)과 신동(新洞)이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병합하면서 상동의 상자와 신동의 신자를 따서 상신리로 정하고 그 때부터 상신리로 불려졌다.
○ 금곡동(琴谷洞) : 고려시대에는 금음촌처(今音村處)라 하여 옹기를 주로 취급하는 점포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고 전한다. 주민들이 옹기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드는 일 등을 하면서 부지런하면서도 겸손하고 인정 많은 생활을 한다고 하여 검정골(儉谷)이라고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금곡동(琴谷洞)이라 정하여 지금까지 불려져 왔다고 전한다,
○ 평촌(坪村) : 조선시대 말엽부터 부지런한 이 마을 주민들은 본래 갯벌이었던 곳을 개척하여 농지로 만들었고 근방에 사람들이 모여 집이 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벌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해서 벌말이라 부르고 한자로 평촌(坪村)으로 적었다.
○ 분향(汾鄕) : 이 마을 남쪽에 칼처럼 생긴 돌산이 있어 칼바위 돌산이라고 하고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돌분양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분향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 손포(孫浦) : 예전에는 마을 바로 앞까지 서해의 갯벌이 펼쳐져 있었으며 이 때에 이 마을에 손(孫)씨가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여 손씨가 모여 사는 갯벌마을이라는 뜻에서 손개라고 하고 한자로 손포(孫浦)라고 적었다.
12. 송곡리(松谷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의 송산리(松山里)와 관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뒷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소나무골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길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곡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13. 수직리(水直里)
이 마을 안에는 샘이 많이 나는 우물이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가 항상 물이 많으며 곧게 흐른다는 뜻에서 수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내의 윗 쪽의 마을을 상수직(上水直), 아래쪽의 마을을 하수직이라고 부르며 우리말로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우뭇골로 불려지고 있다.
○ 부처내 : 황구지천과 갈천이 만나는 곳의 일대를 말한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 조마전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하여 주민들에게도 베풀 줄을 모르고 인정이 없는 부자로 어느 날 인근에 있는 절의 스님이 시주를 부탁하자 쌀이 없다는 말과 함께 쇠똥을 담아주며 조롱하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이 집안의 착한 며느리가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스님에게 사죄하며 쇠똥을 쏟아버리고 대신 쌀을 시주하였더니 그 스님께서 며느리에게 급하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곧장 나를 따라오되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리하여 며느리가 스님의 뒤를 따라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되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니 스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도 잊고 며느리가 집을 향하여 돌아보니 부잣집은 흔적도 없어지고 며느리는 그 자리에 돌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와 같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 마을 앞에는 돌부처가 남아 있다.
14. 증거리(增巨里)
『화성지』 남면의 마을 편에 증거리(曾巨里)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남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마을이 더욱 번성하여 큰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증거리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원래의 마을 이름은 진개울 혹은 진계울이라 하여 큰 개울(황구지천)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연유한다고 추정된다.
○ 진개울〔진개원(溪苑)〕 :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큰 개울이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에서 진개울(溪苑)이라 불렸다가 증거울(增巨谷), 다시 진개울로 전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15. 요리(料里)
『화성지』의 남면 마을 편에 요동리(料洞里)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불려진 마을 이름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갈대(蓼)가 많아 요리(蓼里)로 불려지던 것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현재의 요리(料里)로 바꾸어 불렀으며 지금도 자연 부락 이름으로 요골이 널리 불려진다.
16. 제암리(堤岩里)

[사진-105. 제암리 마을 전경(1990) ]
팔탄면의 고주리(古州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제방(堤防)과 논두렁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두렁바위라고도 불렸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넘말(너머 마을), 곡구래미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한자로 적으며 제암리라고 했다. 이 마을은 3·1운동 당시의 일경의 만행으로 제암교회에 교인과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불을 지른 3·1운동순국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17. 평리(評里)
예전부터 이 마을 앞으로 평야(발안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넓은 벌판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벌말로도 불렸다.
18. 하길리(下吉里)
조선시대 말기에는 남양군 분향면(分鄕面)의 지역으로 있었으며 당시 면소재지 아래쪽의 안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금의 향남면으로 편입되면서 하길리라고 붙여졌다고 전한다. ○ 마곡(麻谷) :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 뒷산에 마곡사(麻谷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마침내 절은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마곡사란 절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남아 있으며 마골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사창(社倉) : 『화성지』의 공향면 마을 편에 수록된 창동(倉洞)이라는 명칭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창이라는 이름에서 이 마을이 창고와 연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창(社倉)의 사(社)는 원래 민가가 여럿 모여 한 부락을 이룬다는 뜻이며 창(倉)은 창고(倉庫)의 의미로서 조선시대 나라에서 가뭄, 홍수 등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에 주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환곡(還穀)을 저장해 두던 고을의 곳집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매년 풍년이 들어 날로 번창 할 때에 어느 고승(高僧) 한 분이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려 마을이 더욱 잘 살게 되고 계속 풍년이 들어 남아도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창고를 많이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하나 전자의 연유가 옳은 유래로 보인다.
○ 안길(安吉) : 이 마을은 예전부터 홍수나 가뭄, 전염병이 창궐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이 안전하고 길(吉)한 마을이 되어 달라는 기원의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우리말로는 안길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창덕골〔창덕곡(倉(昌)德谷)〕 : 사창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한 도승(道僧)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 마을은 나무가 무성해야 큰 덕을 본다고 예언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 행정리(杏亭里)
『화성지』의 공향면(貢鄕面) 마을 편에 정촌(亭村)이 표기되어 있어 오래 전부터 정자가 있는 마을로 불려졌다고 추정한다. 1914년 일제의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행정(上杏亭), 하행정, 분촌 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행정리라고 정하였다. 이 마을 주변에는 예전부터 은행나무가 많고 곳곳에 마을 주민과 노인들의 쉼터인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우리말로 은행정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한다.
○ 분촌(分村) : 본래 이곳을 세면〔서면(西面)〕이라고 불렀는데 이 세면에서 분리되어 나눈다는 뜻의 분촌(分村)으로 다시 변하여 분비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 세면〔서면(西面)〕 : 조선시대에 수원부(水原府)의 서면(西面) 면소재지가 이 마을에 있어 서면에서 세면으로 변화되어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20. 화리현리(禾里峴里)
『화성지』의 남면의 마을 편에 화리현(禾里峴)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는 수원부(水原府)의 남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양석골(兩石谷)을 합하여 화리현리라고 정하고 지금의 향남면에 포함시켰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토질이 좋고 주민들도 농사짓기에 부지런하여 벼도 다른 마을보다 두 배나 더 생산된다는 뜻에서 양석(兩石)이라고 불렸다고 하며 또한 고개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 수리재 : 예전부터 샘물이 풍부하고 고개가 많고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의 고개에 수리(독수리)가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양석골〔양석곡(兩石谷)〕 : 이 마을은 예전부터 샘물이 풍부하고 마을 주민들도 농사짓기에 부지런하여 가뭄이 들어도 벼농사가 잘되어 양석의 생산을 거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