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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위원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학술·향토문화 분야

[고려이전 종교] 원효(元曉), 617년(신라 진평왕 39) ~ 686년(신문왕 6)

카테고리
화성의 향토인물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76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學僧)으로 여러 종파의 불교를 하나의 진리로 귀납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체계화한 화쟁사상(和諍思想), 일심(一心)을 만물의 주추(主樞)로 삼고 일심의 세계야말로 극락이라는 일심사상(一心思想), 그리고 뭇 사람의 마음이 원융하여 걸림이 없다거나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을 제시한 신라의 고승이다. 특히 불교의 여러 종파가 대립하는 것을 배격하였고, 한 불경에만 집착하지 않으면서 여러 종파의 모순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융화·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대 김춘추 계통의 진골 전제주의가 내포하고 있던 사회적 모순을 사상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경상도 압량(押梁) 출신으로 속성은 설(薛)씨이고, 신분은 6두품으로 알려져 있다(5두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하여 낳은 유학자 설총(薛聰)이 아버지인데 그는 파계한 뒤에 민중불교인 정토교(淨土敎)를 널리 전파한 승려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원효는 현재의 화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가 661년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에 유학가던 도중 깨달음을 얻은 뒤 입당(入唐)을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린 사건이 바로 당성(唐城), 즉 지금의 남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전말을 『송고승전(宋高僧傳)』권4, 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에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입당하다가 요동에서 잡혀 실패한 원효는 45세 때 다시 의상과 당에 유학하기로 뜻을 같이 하고 가던 도중 서해 바다를 건너려고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렀다.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중도에 머물러 있는데 궂은� 비를 만났다. 마침 길가에 있던 땅막에 은신하여 비바람을 피하고 그날 밤을 지냈는데 이튿날 새벽에 살펴보니 옛 무덤으로 옆에는 해골이 있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땅은 진창인지라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그 안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한밤중이 되지 않았는데도 귀신이 나타나는 등 괴이한 밤을 보내야 했다. 원효가 탄식하기를 지난 밤에는 땅막이라 생각하여 편안하였는데 오늘 밤에는 무덤인 사실을 알고 잠을 자니 귀신의 장난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면서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온갖 법(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

또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하겠는가.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하면서 입당을 포기하고 도로 돌아갔던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배를 타려고 머물다가 무덤에서 밤을 보냈던 곳으로 기록된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당주(唐州)는 고구려의 영역일 때부터 당성군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당은군으로 개명된 지금의 남양 땅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聖王)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이 지역을 공취(攻取)하고 다시 신라 영토로 편입시킨 뒤 당성은 신라와 중국의 중요한 교통로이자 무역로였다. 앞에서 제시한 원효의 행적대로라면 원효는 당시 당성의 당항포(唐項浦) 부근 어느 곳에서 묵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무덤 안에서 이틀 밤을 지새고 귀신의 장난에 괴롭힘을 당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 내용이나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세전(世傳)의 사실여부를 떠나 마음 밖에 법이 없다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당이 아닌 신라에서 그 진리를 찾고자 입당을 그만두었다는 원효의 독특하고 차원 높은 자각과 신라인으로서의 주체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어떻든 전해오는 원효의 큰 깨달음이 지금의 화성시에 있던 당성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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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긴 학… 작성일 22-06-08 09:38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學僧)으로 여러 종파의 불교를 하나의 진리로 귀납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체계화한 화쟁사상(和諍思想), 일심(一心)을 만물의 주추(主樞)로 삼고 일심의 세계야말로 극락이라는 일심사상(一心思想), 그리고 뭇 사람의 마음이 원융하여 걸림이 없다거나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을 제시한 신라의 고승이다. 특히 불교의 여러 종파가 대립하는 것을 배격하였고, 한 불경에만 집착하지 않으면서 여러 종파의 모순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융화·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대 김춘추 계통의 진골 전제주의가 내포하고 있던 사회적 모순을 사상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경상도 압량(押梁) 출신으로 속성은 설(薛)씨이고, 신분은 6두품으로 알려져 있다(5두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하여 낳은 유학자 설총(薛聰)이 아버지인데 그는 파계한 뒤에 민중불교인 정토교(淨土敎)를 널리 전파한 승려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원효는 현재의 화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가 661년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에 유학가던 도중 깨달음을 얻은 뒤 입당(入唐)을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린 사건이 바로 당성(唐城), 즉 지금의 남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전말을 『송고승전(宋高僧傳)』권4, 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에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입당하다가 요동에서 잡혀 실패한 원효는 45세 때 다시 의상과 당에 유학하기로 뜻을 같이 하고 가던 도중 서해 바다를 건너려고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렀다.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중도에 머물러 있는데 궂은� 비를 만났다. 마침 길가에 있던 땅막에 은신하여 비바람을 피하고 그날 밤을 지냈는데 이튿날 새벽에 살펴보니 옛 무덤으로 옆에는 해골이 있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땅은 진창인지라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그 안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한밤중이 되지 않았는데도 귀신이 나타나는 등 괴이한 밤을 보내야 했다. 원효가 탄식하기를 지난 밤에는 땅막이라 생각하여 편안하였는데 오늘 밤에는 무덤인 사실을 알고 잠을 자니 귀신의 장난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면서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온갖 법(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

또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하겠는가.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하면서 입당을 포기하고 도로 돌아갔던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배를 타려고 머물다가 무덤에서 밤을 보냈던 곳으로 기록된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당주(唐州)는 고구려의 영역일 때부터 당성군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당은군으로 개명된 지금의 남양 땅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聖王)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이 지역을 공취(攻取)하고 다시 신라 영토로 편입시킨 뒤 당성은 신라와 중국의 중요한 교통로이자 무역로였다. 앞에서 제시한 원효의 행적대로라면 원효는 당시 당성의 당항포(唐項浦) 부근 어느 곳에서 묵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무덤 안에서 이틀 밤을 지새고 귀신의 장난에 괴롭힘을 당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 내용이나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세전(世傳)의 사실여부를 떠나 마음 밖에 법이 없다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당이 아닌 신라에서 그 진리를 찾고자 입당을 그만두었다는 원효의 독특하고 차원 높은 자각과 신라인으로서의 주체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어떻든 전해오는 원효의 큰 깨달음이 지금의 화성시에 있던 당성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