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 부서 | 성명 | 소속 및 직위 | 담당 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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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묵 위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 민속기록 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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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준 위원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 |
| 박재형 위원 |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 학술·향토문화 분야 |
[고려이전 종교] 염거(廉巨), 미상 ~ 844년(문성왕 6)
카테고리
화성의 향토인물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71

염거는 신라 말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제2대 교조이다. 가지산문의 개조 도의(道義)가 당에서 귀국한 뒤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열었으나 당시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염거는 도의로부터 남종선을 전수하고 수제자로서의 심인(心印)을 받았다. 도의는 염거에게 선(禪)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였다. 그 후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로 거주하면서 선법을 펴는 데에 주력하고 사교(邪敎)를 배척하였으며 항상 일심(一心)을 닦고 밝혀서 삼계(三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禪)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당시 오직 일념무주(一念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도의로부터 전수한 불법을 제자 체징(體澄)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염거화상의 행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재의 화성시 영역에서 거처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지금 용주사(龍珠寺)의 자리에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창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절터만 남아있다가 정조(正祖)에 의해 현릉원(顯陵園)의 원찰로 용주사가 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갈양사와 염거의 관계에 대해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자. 혜거국사 비문에 “개보(開寶) 3년(970) 봄 국사(國師)가 임금께 이르기를 ‘수주부(水州府) 갈양사(葛陽寺)가 산이 맑고 물이 수려하여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 될 것이오니 원컨대 기도하는 장소로 만드시옵소서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라고 하였다.”는 고려 광종대의 국사 혜거(惠居)의 상주문과 용주사 범종에 새겨져 있는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梵鐘) 일구(一口)는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 근으로 주조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에 사문(沙門) 염거(廉居) (용주사(龍珠寺) 범종명(梵鐘銘))”이라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앞의 글은 970년(고려 광종 21) 당시 혜거국사가 수주에 있는 갈양사를 나라의 복을 비는 사찰로 지정해 줄 것을 임금께 상주하였다는 고려 성종 때의 관리 최량(崔亮)의 글이고(994년 씀), 다음 글은 용주사 범종의 명문으로 갈양사의 범종이 854년(문성왕 16)에 조성되었다는 염거 화상의 글이다. 두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수주에 있는 갈양사 범종 명문은 염거가 신라 문성왕 때 지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범종이 고려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명문도 염거가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누가 새겨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갈양사는 염거가 신라 문성왕 때 창건하고 이곳에서 불법을 닦았던 것으로 전해온다.
844년(문성왕 6) 조성된 염거화상의 팔각원당형 부도(국보 104호)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전할 때 탑지(塔誌)의 지판(誌板)이 발견되어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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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는 신라 말 선종구산(禪… 작성일 22-06-08 09:37염거는 신라 말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제2대 교조이다. 가지산문의 개조 도의(道義)가 당에서 귀국한 뒤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열었으나 당시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염거는 도의로부터 남종선을 전수하고 수제자로서의 심인(心印)을 받았다. 도의는 염거에게 선(禪)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였다. 그 후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로 거주하면서 선법을 펴는 데에 주력하고 사교(邪敎)를 배척하였으며 항상 일심(一心)을 닦고 밝혀서 삼계(三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禪)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당시 오직 일념무주(一念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도의로부터 전수한 불법을 제자 체징(體澄)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염거화상의 행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재의 화성시 영역에서 거처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지금 용주사(龍珠寺)의 자리에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창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절터만 남아있다가 정조(正祖)에 의해 현릉원(顯陵園)의 원찰로 용주사가 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갈양사와 염거의 관계에 대해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자. 혜거국사 비문에 “개보(開寶) 3년(970) 봄 국사(國師)가 임금께 이르기를 ‘수주부(水州府) 갈양사(葛陽寺)가 산이 맑고 물이 수려하여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 될 것이오니 원컨대 기도하는 장소로 만드시옵소서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라고 하였다.”는 고려 광종대의 국사 혜거(惠居)의 상주문과 용주사 범종에 새겨져 있는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梵鐘) 일구(一口)는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 근으로 주조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에 사문(沙門) 염거(廉居) (용주사(龍珠寺) 범종명(梵鐘銘))”이라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앞의 글은 970년(고려 광종 21) 당시 혜거국사가 수주에 있는 갈양사를 나라의 복을 비는 사찰로 지정해 줄 것을 임금께 상주하였다는 고려 성종 때의 관리 최량(崔亮)의 글이고(994년 씀), 다음 글은 용주사 범종의 명문으로 갈양사의 범종이 854년(문성왕 16)에 조성되었다는 염거 화상의 글이다. 두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수주에 있는 갈양사 범종 명문은 염거가 신라 문성왕 때 지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범종이 고려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명문도 염거가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누가 새겨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갈양사는 염거가 신라 문성왕 때 창건하고 이곳에서 불법을 닦았던 것으로 전해온다.
844년(문성왕 6) 조성된 염거화상의 팔각원당형 부도(국보 104호)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전할 때 탑지(塔誌)의 지판(誌板)이 발견되어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