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07/합천뉴스] 217년 전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과 합천, 그리고 삼가장터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6
조회
126

217년 전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과 합천, 그리고 삼가장터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경기도 화성시 출생인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 1760~1815)의 후예들이 지난 주 9월27일 합천을 방문했다. 화성 향토문화연구소 정찬모 부원장 등 16명이 관광버스로 합천을 다시 찾은 것이다.
1799년(정조23) 문무자 이옥이 ‘봉성문여(鳳城文餘)’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옛 삼가장터(삼가시장)를 비롯한 삼가 외토리 백비(白碑)와 뇌룡정, 용주 황계폭포, 그리고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등을 둘러 봤다. 특히 문무자가 기록했던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 당시를 기억하며, 이를 관광 상품화하는 방안을 찾아 나선 것이다. ‘봉성(鳳城)’은 ‘삼가(三嘉)’의 옛 이름이다.
문무자 이옥은 고전적이고 격식을 갖춘 품격 있는 당송(唐宋)의 시(詩)와 고문(古文)에 배치되는 글을 쓰지 말라는 정조 임금의 이른바 문체반정 정책에 따르지 않고, 소품체(小品體)를 구사하며 괴이하고 불경스런 글을 썼다는 이유로 삼가현으로 귀양, 즉 충군(充軍)돼 왔다.
문무자는 삼가읍성 서문 밖 금리 하금마을 박대성(朴大成)의 점사(店舍: 주막)에 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밥을 사 먹으며 지냈다. 120여 일 머물며 기록한 우리 합천과 관련한 내용으로는, ‘시기(市記), 시투(市偸), 정인홍상, 조장군검, 황계폭포, 방언, 정금당, 백의당(白衣裳), 매구굿[魅鬼戱]’ 등 16개나 된다. 1800년 전후의 풍속, 문화, 역사, 생활상 등 우리 선조들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필자가 봉성문여를 본 것은 2004년쯤이다. 봉성문여 ‘정인홍상(鄭仁弘象)’에는 “합천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가야산에 풀이 마른 뒤에 인홍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띠집(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 그 옛터에 있었고, 그 띠집 안에 인홍의 초상화가 있었다. 마을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받들어 모시기를 음사(淫祠: 합당하지 않은 사당)와 같이 한 것이 100 여 년이었다. 합천군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사실을 물어서 알고는, ‘죽은 역적이 무슨 사당인가’하고 불을 지르도록 명했다. 불을 지르자 집이 타버렸고, 초상화에 불이 붙지 않고 바람이 휙 불어 들려 올라가 마치 귀신이 있는 듯했다. 군수가 성을 내며 초상에다 돌을 눌러 불을 지르니 비로소 불이 붙었다. 얼마 안 돼 군수의 처자식들이 모두 병으로 죽었고, 군수 또한 마침내 법(法)에 걸려 죽었다. 합천사람들은 지금까지 불 때문에 부른 화(禍)라고 여기고 있다. 그 초상화는 늙은 여우를 닮았다고 한다”고 기록해 뒀다.
또한 ‘조장군검(曹將軍劍)’에서는 “삼기(三岐) 판치촌(板峙村, 주: 삼가면 하판리 갓골마을)에 조씨(曹氏)가 있는데, 장군은 남명선생의 일족(주: 남명 동생의 손자)으로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준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나아갔다. 장군의 칼은 여태껏 아무 탈이 없고 곰팡이에 부식되지 않았다”고 했다.
문무자가 쓴 합천 관련 내용 중, 1800년 설을 나흘 앞두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삼가장터 풍경, 즉 ‘시기(市記)’는 문무자가 쓴 봉성문여 중에서 가장 내 가슴에 와 닿는 백미 중 백미라고 생각한다.
역사, 문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차별화된 관광 마케팅만이 지속 가능하다. 드라마세트장·청와대 건물 건립 등 국적불명의 사업은 합천의 미래 동력을 날려버린 무지(無知)의 상징적 사업이다.
문무자 이옥이 쓴 이 ‘시기(市記)’를 재현하여 관광 상품화하고, 전통시장 활성화에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지역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차별화된 관광 마케팅만이 지속 가능한 것이고, 인구감소로 큰 어려움에 봉착한 합천군을 살릴 수 있는 방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백억 원의 막대한 혈세를 투입하여 건립한 용주면의 드라마세트장 및 청와대 건물 등과 같은 국적불명의 사업은, 향후 우리 합천군의 미래 동력을 날려버린 암적인 존재로, 무지(無知)의 상징적 사업으로 기록될 것이다.

◇시기(市記: 삼가장터 풍경): 217년 전 문무자 이옥이 기록한 장터(시장) 모습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은 저자(장터)와 가까운 곳이다. 매양 2일과 7일이면 저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저자 북쪽은 곧 내가 거처하는 남쪽 벽 아래인데, 벽은 본래 바라지도 없는 것을 내가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멍을 뚫고 종이창을 만들어 놓았다. 종이창 밖,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낮은 둑이 있는데, 저자에 가기 위해 드나드는 곳이다. 종이창에는 또한 구멍을 내어놓았는데, 겨우 한쪽 눈으로 내다 볼만했다.
12월 27일 장날에 나는 무료하기 짝이 없어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서 밖을 엿보았다. 때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고 구름 그늘이 짙어 분변할 수 없었으나, 대략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사람,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 닭을 안고 오는 사람, 문어를 들고 오는 사람, 멧돼지 네 다리를 묶어 짊어지고 오는 사람, 청어를 묶어 들고 오는 사람, 청어를 엮어 주렁주렁 드리운 채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오는 사람, 대구를 가지고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대구나 문어를 가지고 오는 사람, 잎담배를 끼고 오는 사람, 미역을 끌고 오는 사람, 섶과 땔나무를 매고 오는 사람, 누룩을 지거나 이고 오는 사람, 쌀자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곶감을 안고 오는 사람, 종이 한 권을 끼고 오는 사람, 짚신을 들고 오는 사람, 미투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 큰 노끈을 끌고 오는 사람, 동이와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돗자리를 끼고 오는 사람, 나뭇가지에 돼지고기를 꿰어 오는 사람, 강정과 떡을 들고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업고 오는 사람, 병 주둥이를 묶어 휴대하고 오는 사람, 짚으로 물건을 묶어 끌고 오는 사람, 버드나무 상자를 지고 오는 사람, 광주리를 이고 오는 사람, 바가지에 두부를 담아 오는 사람, 사발에 술과 국을 담아 조심스럽게 오는 사람, 머리에 인 채 등에 지고 오는 여자, 어깨에 무엇을 얹은 채 어린아이를 이고 오거나 머리에 이고 다시 왼쪽에 물건을 낀 남자, 치마에 물건을 담고 옷섶을 잡고 오는 여자, 서로 만나 허리를 굽혀 절하는 사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서로 화를 내며 발끈하는 사람, 손을 잡아끌어 장난치는 남녀, 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 왔다가 다시 가는 사람, 갔다가 또 다시 바삐 돌아오는 사람, 넓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을 사람,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사람, 좁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는 사람, 소매가 좁고 짧으며 자락이 없는 옷을 입는 사람, 방갓에 상복을 입은 사람, 승포와 승립을 한 중[僧], 패랭이를 쓴 사람 등이 보인다.
여자들은 모두 흰 치마를 입었는데, 혹 푸른 치마를 입은 자도 있었고, 아이로서 의대를 갖춘 자도 있었다.
남자가 머리에 쓴 것 중에는 자주빛 휘향(주: 방한모)을 착용한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며, 목도리를 두른 자도 열에 두셋이었다.
패도(주: 칼집이 있는 작은 칼)는 어린아이들 역시 차고 있었다.
서른 살 이상 된 여자는 모두 조바위를 썼는데, 흰 조바위를 쓴 이는 상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늙은이는 지팡이를 짚었고,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손을 잡고 갔다.
행인 중에 술 취한 자가 많아, 가다가 엎어지기도 하고 급한 자는 달려갔다. 아직 다 구경을 하지 못했는데, 나무 한 짐을 짊어진 사람이 종이 창밖에서 담장을 정면으로 향한 채 쉬고 있었다.
나 또한 궤안에 의지해 누웠다. 세모(歲暮)인 터라 저자(장터)가 더욱 붐비고 있다.”
*217년 전 당시 삼가장터는 기양루(岐陽樓) 뒤쪽에 있었다. 삼가장터는 1937년 12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8천원으로 논을 매입하고 복토하여 건물을 짓고 이전한 것이다.


삼가장터(시장)는 서부경남에서 알아주는 큰 장터였다. 문무자 이옥이 1799년 음력 12월 27일 방에 드러누워 문종이 구멍을 통해 삼가장터 풍경을 보고 기록한지 120년이 지난 1919년 음력 2월 17일 및 22일 삼가장날에, 2차례 걸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제(日帝)에 항거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