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 부서 | 성명 | 소속 및 직위 | 담당 분야 |
|---|---|---|---|
| 화성학연구소 | 심일종 소장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연구소 운영 총괄 |
| 정찬모 부소장 | 화성시지역학연구소장, 화성문화원 이사 | 지역 실무위원 총괄 | |
| 한동민 위원 | 화성시독립기념관 관장 | 지역학·독립운동사 분야 | |
| 김덕묵 위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 민속기록 분야 | |
| 최종성 위원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역사·종교 분야 | |
| 이관준 위원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 |
| 박재형 위원 |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 학술·향토문화 분야 |
제1장 개관 제3절 화성지명의 기원과 변천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57
주지하는 대로 오늘날의 화성은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하여 북으로 수원과 안산, 남으로 평택과 오산, 동으로는 용인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해 바다에 면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북부로 뻗어내려 수리산(修理山)이 안양과의 경계에 솟아 그 여맥이 계속 이어져 칠보산(七寶山), 서봉산(棲鳳山), 조두산(鳥頭山), 태봉산(泰峰山), 태행산(太行山) 등의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구릉성(丘陵性)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산들은 모두 해발 300m 미만의 야산들로서 그 사이로 발안천을 비롯하여 남양천, 반월천 등의 시내가 서쪽의 넓은 화성평야를 적시고 흘러 서해로 유입된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여 남양반도(南陽半島), 조암반도(朝岩半島) 등의 만(灣)이 형성되어 있고, 연해(沿海)에는 제부도(濟扶島)를 비롯한 여러 섬들이 산재해 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해안의 수심이 얕아 좋은 항구는 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에도 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팔탄면, 양감면, 서신면, 마도면 등지에서 돌칼, 철촉, 토기 등 신석기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거치는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이곳 바닷가로 몰려온 사람들은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마을을 형성하여 화성의 역사를 생성하게 되었다.
『삼국지』나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이 바로 이 곳 화성 지역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마한의 54국(國) 중에는 진한(辰韓)의 소국(小國)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바 경기도에 속한 14개국이 마한이 아닌 진한의 소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화성 지역에 속하는 부족국가로는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등 다섯 소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다섯 소국 중 원양국(爰襄國)은 지금의 음덕면(陰德面) 일대라 비정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남양도호부조(條))에 의하면 이 곳은 당성군(唐城郡)의 속현으로 안양현(安陽縣) 또는 재양현(載陽縣)이라 기록되어 있다. 상외국(桑外國)은 장안면 및 우정면 일대로 속칭 삼귀(三歸) 혹은 삼귀(三貴), 삼괴(三槐)라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때는 쌍고현(雙皐縣)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한편 모수국(牟水國)은 고구려 때의 매홀(買忽)로 이어지고,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후 경덕왕(757년) 대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소석삭국(小石索國)과 대석삭국(大石索國)은 서로 인접해 있는 서해안의 어느 섬이라고 짐작되나 그 정확한 위치는 상고할 수가 없다. 어떻든 화성은 북방으로부터 옮겨 온 이민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고장으로서 내륙의 모수국(牟水國)으로부터 서해안의 원양국(爰陽國), 서남향으로 상외국(桑外國), 그리고 섬 지역으로 대·소삭국(大·小索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고구려 세력에 놓이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지명들은 대략 이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곧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호칭되었던 매홀(買忽), 당성(唐城), 차성(車城) 등이 그런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당항성(黨項城)이라고도 칭했던 당성(唐城)은 고구려에 의해 축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639년)이 당나라에서 학자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니 당태종은 홍천하(洪天河)와 은세통(殷世通) 등 8인을 보냈다고 한다. 이들 8인의 학자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처음 머문 곳이 은수포(銀樹浦, 당곶(唐串)이라고도 함)였는데 영류왕은 이들을 환영하여 성을 쌓고 그 덕행을 치하하여 ‘사적당성(賜籍唐城)’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639년이라면 화성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 신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이 기록만은 후세에 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남양(南陽)의 전신인 당성(唐城)이란 이름은 그 남쪽에 있는 충남 당진(唐津)과 더불어 삼국시대 중국 당(唐)나라와의 교섭에서 비롯되었음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세월 따라 사람 따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땅이름은 변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변한 이름들은 문헌상에 기록으로 남아 전하기 마련인데 다만 이런 문자기록은 당시의 실제 호칭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화성 땅에 있었다던 여러 부족국가들, 이를테면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대·소석삭국(大·小石索國) 등의 당시 호칭과 그 정확한 발음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었기 때문인데 당시 한자의 음(音)과 뜻(흔히 ‘訓’이라고 함)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했던,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난해성이 이들 고유지명의 정확한 해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앞서 원양국(爰襄國)의 계승인 당성(唐城)이란 지명은 처음부터 중국 당과의 교섭에서 생겨난 한자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수국(牟水國)만은 다행히도 고구려 때 매홀(買忽)로 이어져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다. 모수(牟水)→매골〔買忽, 여기서 ‘忽’은 ‘홀’로 읽히지만 당시는 ‘골’을 표기한 것이다〕로 기록된 고유이름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다시 한자어의 침투를 받게 된다. 곧 순수한 우리말로 호칭되던 삼국의 땅이름들이 2자(字)의 한자말 이름으로 바뀌는 소위 말하는 지명 개혁을 맞게 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757년(경덕왕 16)에 매골〔買忽〕이란 이름이 지명 본래의 의미를 살린 수성(水城)이란 한자명으로 한역된 것이다. 물론 지명의 특성인 보수성으로 인하여 어느 시기까지는 원주민들에 의해 매골〔買忽〕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성(水城)으로 출발한 한자어 이름은 이후 수주(水州), 수원(水原) 등을 거치는 동안 지역민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수(水)’ 자 계의 행정지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성(水城)은 고려 초(태조 23, 940년) 중국식을 모방하여 수주(水州)로 개칭하고 다시 수주목(水州牧)을 거쳐 지금처럼 수원(水原)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310년(고려 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물을 뜻하는 ‘수(水)’에 언덕을 뜻하는 ‘원(原)’이 붙게 된 것은 이 곳에 구릉성 산지, 곧 언덕[原〕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지형상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못이나 저수지와 같은 물이 많고 또 낮은 야산, 곧 언덕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 이 지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후 수원이란 이름의 변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城)에서 시작하여 군(郡), 주(州), 부(府), 도호부(都護府), 목(牧), 읍(邑), 시(市) 등의 변화는 단순히 지명접미사(‘地名普遍素’라고도 부름)의 차이로서 이는 행정상 개편 때마다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수원(水原)이란 이름에서 또 하나의 지명, 즉 ‘화성(華城)’이란 이름이 파생되었다는 사실이다. 화성(華城)이란 한자지명은 1789년 조선조 정조 대왕이 선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이 지역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해 성을 쌓음으로써 비롯되었음은 잘 알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수원시와 화성시는 행정상 별개의 명칭이 되었지만 기원적으로는 이들을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다. 200여 년 전 정조는 수원부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면서 그 이름을 친히 써서 장남헌(壯南軒) 현판으로 걸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 건설을 위해 새로이 성(城)을 쌓으면서 수원성(水原城)이란 이름 대신 무엇을 근거로 ‘화(華)’ 자를 쓰게 되었을까? 이 땅의 지명유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원(水原)과 화성(華城)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그 중에서도 ‘수(水)’와 ‘화(華)’의 관계부터 규명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매화리(梅花里)에서 ‘화(花)’는 꽃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지형이 바다 쪽으로 쭉 삐져나온 곳에 붙는 고지→곶[串]의 차훈 표기라고 했다. 또한 한자 화(花)는 화(華)와 상통하는 글자로서 정조는 중국 지명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신축하는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정했을 것이다. 매(買), 매(梅)와 수(水), 그리고 화(花), 화(華)와 곶(串) 등이 실지 화성시의 지명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제4절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이들 산들은 모두 해발 300m 미만의 야산들로서 그 사이로 발안천을 비롯하여 남양천, 반월천 등의 시내가 서쪽의 넓은 화성평야를 적시고 흘러 서해로 유입된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여 남양반도(南陽半島), 조암반도(朝岩半島) 등의 만(灣)이 형성되어 있고, 연해(沿海)에는 제부도(濟扶島)를 비롯한 여러 섬들이 산재해 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해안의 수심이 얕아 좋은 항구는 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에도 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팔탄면, 양감면, 서신면, 마도면 등지에서 돌칼, 철촉, 토기 등 신석기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거치는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이곳 바닷가로 몰려온 사람들은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마을을 형성하여 화성의 역사를 생성하게 되었다.
『삼국지』나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이 바로 이 곳 화성 지역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마한의 54국(國) 중에는 진한(辰韓)의 소국(小國)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바 경기도에 속한 14개국이 마한이 아닌 진한의 소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화성 지역에 속하는 부족국가로는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등 다섯 소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다섯 소국 중 원양국(爰襄國)은 지금의 음덕면(陰德面) 일대라 비정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남양도호부조(條))에 의하면 이 곳은 당성군(唐城郡)의 속현으로 안양현(安陽縣) 또는 재양현(載陽縣)이라 기록되어 있다. 상외국(桑外國)은 장안면 및 우정면 일대로 속칭 삼귀(三歸) 혹은 삼귀(三貴), 삼괴(三槐)라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때는 쌍고현(雙皐縣)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한편 모수국(牟水國)은 고구려 때의 매홀(買忽)로 이어지고,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후 경덕왕(757년) 대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소석삭국(小石索國)과 대석삭국(大石索國)은 서로 인접해 있는 서해안의 어느 섬이라고 짐작되나 그 정확한 위치는 상고할 수가 없다. 어떻든 화성은 북방으로부터 옮겨 온 이민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고장으로서 내륙의 모수국(牟水國)으로부터 서해안의 원양국(爰陽國), 서남향으로 상외국(桑外國), 그리고 섬 지역으로 대·소삭국(大·小索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고구려 세력에 놓이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지명들은 대략 이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곧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호칭되었던 매홀(買忽), 당성(唐城), 차성(車城) 등이 그런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당항성(黨項城)이라고도 칭했던 당성(唐城)은 고구려에 의해 축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639년)이 당나라에서 학자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니 당태종은 홍천하(洪天河)와 은세통(殷世通) 등 8인을 보냈다고 한다. 이들 8인의 학자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처음 머문 곳이 은수포(銀樹浦, 당곶(唐串)이라고도 함)였는데 영류왕은 이들을 환영하여 성을 쌓고 그 덕행을 치하하여 ‘사적당성(賜籍唐城)’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639년이라면 화성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 신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이 기록만은 후세에 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남양(南陽)의 전신인 당성(唐城)이란 이름은 그 남쪽에 있는 충남 당진(唐津)과 더불어 삼국시대 중국 당(唐)나라와의 교섭에서 비롯되었음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세월 따라 사람 따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땅이름은 변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변한 이름들은 문헌상에 기록으로 남아 전하기 마련인데 다만 이런 문자기록은 당시의 실제 호칭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화성 땅에 있었다던 여러 부족국가들, 이를테면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대·소석삭국(大·小石索國) 등의 당시 호칭과 그 정확한 발음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었기 때문인데 당시 한자의 음(音)과 뜻(흔히 ‘訓’이라고 함)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했던,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난해성이 이들 고유지명의 정확한 해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앞서 원양국(爰襄國)의 계승인 당성(唐城)이란 지명은 처음부터 중국 당과의 교섭에서 생겨난 한자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수국(牟水國)만은 다행히도 고구려 때 매홀(買忽)로 이어져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다. 모수(牟水)→매골〔買忽, 여기서 ‘忽’은 ‘홀’로 읽히지만 당시는 ‘골’을 표기한 것이다〕로 기록된 고유이름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다시 한자어의 침투를 받게 된다. 곧 순수한 우리말로 호칭되던 삼국의 땅이름들이 2자(字)의 한자말 이름으로 바뀌는 소위 말하는 지명 개혁을 맞게 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757년(경덕왕 16)에 매골〔買忽〕이란 이름이 지명 본래의 의미를 살린 수성(水城)이란 한자명으로 한역된 것이다. 물론 지명의 특성인 보수성으로 인하여 어느 시기까지는 원주민들에 의해 매골〔買忽〕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성(水城)으로 출발한 한자어 이름은 이후 수주(水州), 수원(水原) 등을 거치는 동안 지역민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수(水)’ 자 계의 행정지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성(水城)은 고려 초(태조 23, 940년) 중국식을 모방하여 수주(水州)로 개칭하고 다시 수주목(水州牧)을 거쳐 지금처럼 수원(水原)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310년(고려 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물을 뜻하는 ‘수(水)’에 언덕을 뜻하는 ‘원(原)’이 붙게 된 것은 이 곳에 구릉성 산지, 곧 언덕[原〕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지형상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못이나 저수지와 같은 물이 많고 또 낮은 야산, 곧 언덕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 이 지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후 수원이란 이름의 변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城)에서 시작하여 군(郡), 주(州), 부(府), 도호부(都護府), 목(牧), 읍(邑), 시(市) 등의 변화는 단순히 지명접미사(‘地名普遍素’라고도 부름)의 차이로서 이는 행정상 개편 때마다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수원(水原)이란 이름에서 또 하나의 지명, 즉 ‘화성(華城)’이란 이름이 파생되었다는 사실이다. 화성(華城)이란 한자지명은 1789년 조선조 정조 대왕이 선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이 지역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해 성을 쌓음으로써 비롯되었음은 잘 알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수원시와 화성시는 행정상 별개의 명칭이 되었지만 기원적으로는 이들을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다. 200여 년 전 정조는 수원부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면서 그 이름을 친히 써서 장남헌(壯南軒) 현판으로 걸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 건설을 위해 새로이 성(城)을 쌓으면서 수원성(水原城)이란 이름 대신 무엇을 근거로 ‘화(華)’ 자를 쓰게 되었을까? 이 땅의 지명유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원(水原)과 화성(華城)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그 중에서도 ‘수(水)’와 ‘화(華)’의 관계부터 규명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매화리(梅花里)에서 ‘화(花)’는 꽃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지형이 바다 쪽으로 쭉 삐져나온 곳에 붙는 고지→곶[串]의 차훈 표기라고 했다. 또한 한자 화(花)는 화(華)와 상통하는 글자로서 정조는 중국 지명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신축하는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정했을 것이다. 매(買), 매(梅)와 수(水), 그리고 화(花), 화(華)와 곶(串) 등이 실지 화성시의 지명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제4절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