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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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개관 제4절 화성지역 주요 지명의 어원 1. 물에서 비롯된 이름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99

제4절 화성 지역 주요 지명의 어원
1. 물에서 비롯된 이름
1) 牟→買→梅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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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수국(牟水國)에 대한 당시의 호칭도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이를 ‘벌믈' 또는 ‘물벌', ‘물골'의 발음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모수(牟水)에 접미한 국(國)만은 오늘날의 국가 개념으로서의 ‘나라'가 아니라 단순히 ‘온누리'라고 할 때의 ‘누리'〔世〕와 같은 말이라고 짐작된다. ‘모(牟)'의 한자음은 ‘모'이지만 속음(俗音)으로는 ‘무'로도 읽힌다(정확한 고대 한자음은 mou/mau/mu). 자전(字典)에 의하면 모(牟)는 ‘클·모', 또는 ‘땅이름·모'로 적고 있으나 차자표기법에서는 훈(訓)이 아닌 음(音)으로 읽히는 차자이다. 모(牟)가 차음으로 쓰인 또 다른 용례를 보면 모지현(牟支縣), 모산정(牟山亭)과 같은 신라 지명과 모대왕(牟大王), 모도(牟都), 모태(牟太) 등과 같은 백제 인명을 들 수 있다. 지금의 고창의 삼국시대 이름이 모량부리(毛良夫里)였는데 이는 삼한시대의 모로비리(牟盧卑離)의 계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모로(牟盧)와 모량(毛良)이 같은 어형의 다른 표기〔동일어 이양표기(同一語 異樣表記)〕로서 모(牟)나 모(毛)는 다같이 ‘모/무'의 차음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모’ 혹은 ‘무’가 지금의 물〔水〕이란 말의 어형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물의 중세어는 ‘믈’로서 이 믈이 어두에 놓여 다른 말을 수식할 때는 받침 ‘ㄹ’이 떨어져나가 ‘무/모’, 혹은 ‘미’로 쓰일 경우가 있다. 무자이〔水尺〕, 무자위〔小車〕, 무삼〔水蔘〕, 무소〔水牛〕, 무살미(‘물꼬’의 옛말), 무삶이, 무넘이/ 무너미/ 무네미, 무솔, 무좀 따위의 ‘무-’와, 미나리〔芹葉, 물+나리〕, 미장이〔泥水匠〕 등에서 보는 ‘미-’가 바로 그런 예이다. 따라서 모수(牟水)의 모(牟)는 ‘ㄹ’이 탈락한 ‘모’ 또는 ‘무’의 차음표기로서 제 2음절에 붙은 수(水)는 이를 재확인하는 표기라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모수국(牟水國)은 물로 둘러싸인 고장, 즉 물이 많은 ‘물나라’, ‘물누리’ 정도로 불리었다고 볼 수 있다. 모수국(牟水國)의 모(牟)가 중국 측의 표기라면 매홀군(買忽郡)의 매(買)는 우리 측의 표기라 할 수 있다. 매(買)의 중국 한자음 (7C 초 中古音)은 ‘마이’(mai)이며, 우리나라의 전통 한자음은 ‘’라고 추정된다. 앞서 물(믈)이 어두에 놓여 수식어로 쓰일 때는 받침 ‘ㄹ’이 탈락하여 ‘무/모’,또는 ‘미’ 등으로 쓰인다고 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수록된 고구려 지명 중에 (買)가 ‘미’(米 또는 彌)와 동일한 차음자로 쓰인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內乙買 一云內爾米(지리 4) 買召忽 一云彌鄒忽(지리 4) 미(米)와 미(彌)는 중국의 중고음(中古音)이 ‘미에’(miei, 또는 myie)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미’로 읽는다. 물나리를 미나리라고 하고 물장이를 미장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중세어 ‘믈’은 ‘므리’의 어형으로 재구(再構)할 수 있다. 우리 국어가 본래 개음절어(開音節語)였음을 감안하면 믈 역시 받침이 없는 두 음절의 어형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기원형 ‘므리’는 그 말이 놓이는 위치나 여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어형변화를 거쳤으리라 짐작된다. *므리[水]---수식어로 쓰일 경우 : 므리 > / 매 / 모 /미 ---피수식어로 쓰일 경우 : 므리 > 믈 > 물 |

옛 지명 표기에서도 물은 ‘/미' 형과 ‘믈/물'의 두 어형으로 나타난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미' 형이 북방계의 고구려어 계통이고, ‘믈/물' (勿로 표기) 형은 남방계의 한어(韓語) 계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어의 예에서 보듯 그 말이 놓이는 환경에 따른 변이음이지 계통상 다른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떻든 여기에서의 (買)는 그것이 시냇물이거나 우물이거나 간에 일반적인 물을 지칭한다. 고지명에서 매(買)는 수(水) 또는 천(川)이나 정(井)으로도 대응표기 되었으니 다음 예에서 그 사실은 분명해 진다.
伊珍買 > 伊川(지리 2), 內乙買 > 沙川(지리 2)
薩買 > 淸川(지리 2), 伏斯買 = 深川(지리 4)
省知買 = 述川(지리 4), 於斯買 = 橫川(지리 4)
於乙買 = 泉井(지리 4), 於乙買串 > 泉井口 (지리 4)
한편 골(買忽)의 ‘-골'로 읽히는 ‘홀(忽)'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홀(忽)은 지금은 ‘홀'로 읽지만 표기 당시에는 ‘골'로 읽힌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지명에서 가장 많이 쓰인, 지명접미사 ‘골'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취락지를 뜻하는 말이었다. 때로 골〔洞〕은 골짜기를 뜻하는 ‘골'〔谷〕과 혼동되기도 하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반적인 접미사로 굳어진 말이다.
모(牟), 매(買)로 표기되었던 물(水)의 변이형 ‘매(買)'는 근대 이후에는 매(梅)로 대신 표기되었음은 앞서도 말한 바 있다. 매(梅)는 매화나무를 뜻하는 한자인데 이처럼 매(買) 대신 매(梅) 자를 택하게 된 것은 지명표기에서 이왕이면 뜻이 좋은 한자를 쓰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바램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동일어의 표기에서 뜻이 좋은 한자 (이를 가자(嘉字), 또는 가호자(佳好字)라고 함)를 쓰는 표기법을 아역(雅譯)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성과 수원의 지명에서 유독 ‘매(梅)' 자가 눈에 많이 뜨임은 그런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서신면의 매화리(梅花里)에서부터 우정면의 매향리(梅香里), 팔탄면의 매곡리(梅谷里), 송산면의 매화동(梅花洞), 수원 권선구의 매산로(梅山路)와 매교(梅橋) 등이 그런 예라 하겠다.
| 2) 水, 泉, 川, 井, 海 |
| 앞서 화성은 서해 바다에 연해 있으면서 야트막한 야산 사이로 호수나 못, 샘, 우물, 시내 등 물이 많다고 하였는데 이 지역의 지명 속에 이런 지형적 특성이 반영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선 바닷가에 위치하여 해변 고유의 특성을 살린 이름 즉 ① 크고 작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 ② 바닷물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으면서 갯벌에 형성된 마을 ③ 소금이나 양곡을 저장해 두던 곳집〔海倉〕 ④ 바닷가의 모래톱으로 인해 생긴 지명을 비롯하여 그 밖에 일반적인 물과 관련된 지명 용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
(1) 포구(浦口)

[사진-5. 장안면 석포리 돌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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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포(浪浦)·낭개(우정면 석천리) '낭개'또는 한자어 그대로 ‘낭포'로 불린다. 예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몰려왔을 때 특히 이곳에서 물결이 거세었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생성 당시부터 한역(漢譯)으로 출발했던 듯하다. ○ 마산포(馬山浦)·고잔 (송산면 고포리) 송산면 유일한 포구로서 곶(串)으로 형성되어 있어 ‘고지의 안'이라는 뜻으로 ‘고잔'으로 불리었다. 마산포(馬山浦)란 이름은 본래 ‘마루개'〔宗浦의 의미〕라 불리었던 듯하다. 지명에 쓰이는 ‘마(馬)'는 대개 말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대신 ‘으뜸'을 뜻하는 ‘마루>말'〔宗, 首〕의 훈음차(訓音借)한 표기가 대부분이다. 흔히 말하길 조선 중엽에 말이 바다를 건너와 이 포구가 마포(馬浦)로 불려지다가 이후에는 이곳 산세가 말의 형상을 닮아 마산포(馬山浦)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명에 쓰인 한자의 뜻[訓]에 구애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록에 의하면 구한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이 포구로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으며,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갈 때도 이 포구에서 배를 탔다고 전한다. 인근에 있는 마산리(馬山里)와 우정면의 마산동(馬山洞, 말미)도 같은 뜻의 이름으로 이 역시 ‘마루뫼', ‘마루미', ‘말미' 정도로 불리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마을이 전래지명에서 ‘고잔'으로 불린 것은 포구 남쪽에 있는 화량진(花梁鎭)의 화량(花梁)이란 표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량(花梁)은 ‘고지들(돌)', ‘곶돌'의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마을[串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 배머리·녹사리(송산면 고정리) ‘배머리'란 이름은 배가 정박하는 포구의 머리 부분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산의 형국이 배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얻은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배머리는 고잔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또한 녹사리의 ‘녹'은 배의 닻줄을 일컫는 방언이며 ‘녹사리'란 말은 배 닻줄을 감는다는 뜻으로 이 곳이 포구로서 배가 많이 드나든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고정리는 본래 남양면 세곶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고잔(고지의 안쪽이란 뜻)의 ‘고'(古)와 먼우물[遠井]의 ‘정'(井)을 합하여 고정동이 되었다. |
현지에서는 ‘돌소지' 또는 그냥 ‘석포'라 불리기도 한다. 예로부터 돌이 많은 포구여서 그렇게 불렀다는데 이 역시 석(石)의 훈에 구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돌'이라면 바닷가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고유어로서 대개 ‘량(梁, 울돌목의 명양(鳴梁), 노들나루의 노량진(鷺梁津)과 같이)'으로 표기되었으나 여기서는 ‘돌·석(石)' 자를 이 어형의 표기에 사용하였다.
○ 손포(孫浦)·손개(향남면 상신리)
마산포(馬山浦)가 크고 으뜸가는 포구임에 반해 손포(孫浦)는 작고 좁은 포구로서 현지에서 ‘손개'로 불린다. 손개는 ‘좁고 가늘다'라는 뜻의 ‘솔다(細, 狹)'의 관형사형 ‘손-'이 접두한 것으로 한자 ‘손(孫)'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강화도의 손돌〔孫梁〕과 같은 유형의 지명인데 이를 두고 손(孫)씨가 많이 모여 사는 갯벌마을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외포동(外浦洞)·밖개(시동)
‘수리'또는 ‘시리'의 밖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밧(밖)개'라 불린다. 본 마을은 그 지형이 숟가락을 닮았다 하여 ‘숟가락 시(匙)'를 써서 ‘시리'라 일컫게 되었다. 또한 시리 서쪽에 행촌(杏村)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는 마을 주변에 몇 그루의 살구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밖개가 고유어 이름인 반면 시리와 행촌은 처음부터 한자어 이름으로 지어진 것 같다.
○ 유포리(柳浦里)·버들개, 버들무지(비봉면)
이전에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에 어촌이 형성되어 포촌동(浦村洞)이라 불렀다. 지금은 ‘버들개' 또는 ‘버들무지'라 부르는데 이는 포구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자 ‘류(柳)'는 버드나무를 뜻하지만 이 차자가 지명에 쓰일 때는 ‘길게 뻗은' 지형을 가리킨다. 이 곳 유포(柳浦)도 포구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 해문리(海門里, 마도면)
조선조 중엽에는 동네 어귀 산간지대를 배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해문구화역(海門仇火驛)이 있었던 곳으로 그로 인해 붙은 이름이 많다. 해문(동), 역말, 역골, 역곡, 구화, 굿벌 등이 그런 예이다. 해문(海門)에서 보듯 처음부터 한자어로 지어진 이름이다.
○ 해평동(海坪洞)·바다들, 바닷들(서신면 매화리)
매골 남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 매화리(梅花里)에 딸린 곳으로 간척사업으로 형성된 들(坪)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화리는 본래 남양군 신리면 지역으로 맷골, 매골, 매곡, 매동, 또는 나라의 양을 길렀다 하여 목양동이라고도 호칭되었다. 그런데 단지 매골이라면 매곡(梅谷), 또는 매동(梅洞)이 되겠으나 매화(梅花)가 된 것을 보면 ‘고지>곶'(串이 맞지만 대개 花로 훈음차 표기함)이란 또 다른 이름이 첨가된 합성지명이라 생각된다(‘곶'에서 비롯된 이름'의 다음 장 참조).

[사진-6. 향남면 방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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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축리(防築里)·방축말(장안면 수촌리 등) 수촌(水村)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방축말, 배다리, 감나무골, 기장말, 꽃밭, 향골, 용당골을 병합하여 물이 많이 모이는 곳 즉 물골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꽃밭’이란 말은 화전(花田)의 뜻이 아니라 ‘고지밧’ 즉 곶밖〔串外〕이란 의미를 갖는다. 고 지의 안을 뜻하는 ‘고잔’과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 방축동(防築洞) (우정면 멱우리, 봉담면 수기리 등) ○ 수문개(水門開) (서신면 궁평리) 이 곳은 밀물 때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밀려와 농경지가 침수되므로 방죽을 쌓아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을 열고 닫는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開)는 포구를 뜻하는 고유어 ‘개'(浦)를 차음하여 개(開)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수문개는 수문이 있는 포구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 수유리(水溜里) (마도면 청원리) 이 곳은 방조제를 설치했으나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유수(溜水)된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혹은 수루지(水樓池)로도 표기한다. |
| (3) 선창(船倉) |
| ○ 사창(社倉) (향남면 하길리) 사창(社倉)의 ‘사(社)’는 본래 여러 민가가 모여 한 부락을 이루는 촌락공동체를 뜻하며 ‘창(倉)’은 가뭄이나 홍수 따위의 비상시를 대비하여 곡물을 저장하는 곳간으로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이런 사창을 두었다. 하길리(下吉里)는 ‘한절이’의 하동(下洞)과 ‘안길이’(安吉)를 병합할 때 생긴 합성지명이다. ○ 사창리(社倉里) (양감면) 고려 때 쟁홀부곡(爭忽部曲)이 있었던 곳으로 ‘쟁홀’ 혹은 ‘쟁골’이라 불렀는데 조선조 에 와서 사창이 건립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예전 곡식 창고가 있던 자리에서 지금도 기왓장 따위의 흔적이 출토된다고 한다. ○ 선창(船艙) (우정면 주곡리) 장작원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에 선창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이 곳 해변에 포구가 생겨 배가 닿을 수 있는 잔교가 가설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여기서 배를 타고 짐을 싣고 부리게 되면서 자연 어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곡리(珠谷里)는 그 지형이 ‘구슬’(珠)처럼 생겼으므로 구슬, 구실, 구술 등으로 불리던 것을 차훈하여 지금의 주곡이 되었다. ○ 짐대울, 짐촌, 김대울 (향남면 발안리) 예전에는 이 지역 일대가 온통 갯벌이었는데 그 벌의 안(內)쪽에 있다고 하여 ‘벌안〔原 內, 坪內〕’, 또는 ‘발안’이라 불렀다. 발안리의 옛날 이름인 짐대울, 또는 김대울은 선창(船倉)에 해당하는 고유어로서 배에 짐을 싣고 부리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일 것이다. ○ 창촌(倉村)·창말 (우정면 멱우리) 조선 영조 때 백산(柏山) 아래 있던 쌍고창(雙皐倉)이 이 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곳집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이란 이름을 얻었다. 멱우리는 그 지형이 마치 ‘머구리’(개구리의 옛말)처럼 생겼기에 머구리, 또는 머구니로 불리던 것을 음이 비슷한 한자로 차음 표기하였다. ○ 해창리(海倉里) (팔탄면) 고려 때 공이향(工以鄕)이 있었으므로 공이향, 공향이라 했고 조선조에 수원부의 해창(海倉)이 있었으므로 해창 또는 창(倉)말, 창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구한말까지 서해를 통하여 서울과 연결되어 조운(漕運)이 번성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
(4) 기타 물과 관련된 이름

[사진-7. 팔탄면 건달산 아래 기천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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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리(沙浪里)·새랭이 (장안면) 본래 수원부 초장면에 속한 곳으로 ‘새랭이’ 또는 ‘사랑동’이라 칭해 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사랑리(沙浪里)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바닷물이 밀려오는 맨 끝 지역으로 모래사장이 형성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사랑리는 본래 쇠파니를 비롯한 몇 개의 자연부락이 병합할 때 작명된 합성지명으로 사(沙)는 쇠파니의 ‘쇠’에서 연유한 말이 아닌가 싶다. ○ 어은리(漁隱里)·언골, 은골, 어은골 (장안면) 『화성지(華城誌, 1831)』에 나오는 초장면 노은동(魯隱洞)에 해당하는 곳이다. 바뀐 어은(漁隱)이란 이름을 두고 바다의 물고기가 이 곳으로 몰려 와 숨던 곳 또는 출어했다가 풍랑을 만나면 이 곳으로 와서 피난했던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어울(아울)리는' 곳을 어운내[竝川], 그 주변 마을이나 골짜기를 어운골이라 하는 바 어은리 역시 이 같은 이름의 차음 표기가 아닌가 한다. ○ 수영리(水營里) (봉담읍) ‘수영말'로 불리던 이 마을은 고려 말 군사들이 이 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 청요리(靑蓼里) (비봉면) 앞서 소개한 양감면의 요당리(蓼塘里)와 같은 ‘여뀌 요'자를 쓰는 지명이다. 흔히 말하길 이곳에 푸른 갈대〔청요(靑蓼)〕가 많이 자생하여 주민들이 갈대로 살구지를 만들어 고기를 잡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요리(靑蓼里)는 ‘요골동(蓼谷洞)'과 ‘청용동(靑龍洞)'이 병합할 때 두 지명의 첫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합성지명으로 ‘푸른 갈대' 설은 한낱 한자 풀이에 구애된 해석이다. ○ 남양동(南陽洞) 화성·수원지역에서 매골〔買忽〕과 함께 역사가 오랜 고을로서 일찍부터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왔다. 삼국시대 중국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란 뜻에서 당성(唐城), 또는 당항성(唐(黨)項城)으로 호칭되고, 신라 경덕왕 때 당은(唐恩)으로, 흥덕왕 때는 당성진(唐城鎭)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양(南陽)이란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의 고향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나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남양은 물을 경계로 하는 방위 지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원천리는 원막동과 천곡동을 병합한 합성지명이며 이 마을에 속한 개묵은 원막 서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서 개묵은 본래 ‘깻묵'을 차음(借音)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 그곳의 모래가 검어서 땅을 파면 그 색깔이 깻묵처럼 검었다고 한다.
○ 갈천(葛川)·가리내, 갈곡(葛谷)·가래울, 가리울 (향남면)
물이 ‘갈라진다'(分岐)라고 할 때의 ‘가르>갈'을 한자 ‘갈(葛)'로 차음 표기한 것이다. 내(川)가 갈라진 곳에 위치한 마을을 흔히 ‘가래울'이라 하여 이 곳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분포를 보인다. 흔히 말하길, 생활이 어려울 때 그 지역 주민들이 칡(葛)으로 연명했기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하지만 실은 칡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울'은 골짜기(谷)를 뜻하는 ‘골'이란 말의 ‘ㄱ' 탈락형이다.
○ 구문천리(求文川里) (향남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미리〔求蜜〕와 물언이〔文彦〕, 돌내〔石川〕의 세 마을을 합하여 그 첫머리 글자를 딴 합성지명이다. 위의 세 지명은 모두 순수 고유어로서 ‘물언'의 경우는 물(시내)의 안쪽이며 구미리는 굽이진 골짜기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 한우물 (향남면 방축리)
방죽머리 마을 앞에 큰 우물이 있어 본래의 뜻 그대로 ‘한우물'(한역한다면 ‘대정(大井)'이 될 것이다)이라 명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개편 때 한우물은 방죽머리(또는 방죽안), 대밭말과 함께 방축리가 되었다.
○ 수직리(水直里)·우뭇골 (향남면)
역시 이 마을에 좋은 우물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가 ‘곧게' (똑바로) 흐른다고 하여 수직(水直)이라 하고 여기서 윗마을을 상수직(上水直), 아랫마을을 하수직(下水直)이라 부르게 되었다.
○ 불천(佛川)·부처내 (향남면 수직리, 양감면 송산리)
시주를 요청하는 스님에게 오물을 퍼준 부자 주인이 그 벌로 돌이 되었다는 소위 말하는 ‘장자못 설화'가 깃든 시내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그전설의 돌부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양감면 송산리(松山里, 솔미)에도 불천동(佛川洞)이라 표기되는 ‘부처내'가 있는데 여기서는 마을 앞 냇가에서 불상이 여러 점 나왔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 신왕리(新旺里)·샘골(양감면)
마을에 좋은 샘이 있었으므로 새미, 생이, 샘골 등으로 불리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더욱 발전하라는 의미에서 신왕리(新旺里)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딸린 사양동(砂陽洞)도 마을 앞 시내에 모래, 자갈이 많은 데서 유래했다지만 윗마을을 ‘윗생이'(上砂陽)라 하고 아랫마을을 ‘아랫생이'(下砂陽)라 부르는 것을 보면 신양(新陽)이나 사양(砂陽)이란 한자말 이름은 실은 샘의 변이형 ‘생이'에서 비롯된 표기일 것이다.
○ 용소리(龍沼里) (양감면 등)
지명 특히 못이나 우물의 이름에‘용(龍)'자가 들어가는 곳은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대개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본다면 용은 그 자체가 물과 관련이 깊다. 곧 용(龍)의 고유어가 ‘미르'여서 ‘므리'라는 ‘물'의 고대 어형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 기천리(箕川里) (팔탄면)
건달산(乾達山)을 끼고 흐르는 시내를 기천(箕川), 그 시냇가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자연부락을 기천리라 한다. 기천은 ‘아래키울' 즉 하기동(下箕洞)의 ‘箕'와 ‘사내' 즉 사천(沙川)의 ‘川'을 합성한 지명이다. 기(箕)가 곡식을 까불 때 쓰는 기구를 뜻하기에 이 곳 시내의 형상이 키를 닮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 상사천(上沙川)·윗사내 (팔탄면 기천리)
건달산 자락의 윗마을을 ‘윗사내'라 하고 아랫마을을 ‘아랫사내'라 하는데 여기서 사내(沙川)는 그 뜻이 ‘모래내'일 수도 있고 또는 새내(新川) 즉 “새로 생긴 시내”를 지칭할 수도 있다.
○ 금천(金泉)·쇠내 (팔탄면 율암리)
율암리는 ‘밤디'의 율북(栗北)의 ‘栗'과 ‘선돌'의 입암(立岩)의 ‘岩'을 따온 합성지명이다. 금천(金泉)은 율암리에 딸린 마을로 현지에서는 ‘쇠내'라 부른다. 지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金)'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실제로 그 곳에 금(金)이 나기 때문에 이를 지명에 넣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경우 금(金), 즉 쇠/새는 사이(間)의 준말인 ‘새'와 또 새로 생겼다는 ‘새'(新)의 뜻으로 쓰였다. 남양 삼괴 반도의 중간지점에 있는 이 시내는 이런 세 가지 중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 마정동(馬井洞)·말우물, 마루머리(장안면 금의리)
‘말우물'은 큰 우물을 뜻하며 그 우물 머리에 있는 마을을 흔히 ‘마루머리'라 한다. 앞서 마산포의 ‘마루개'란 이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馬)는 동물인 말과는 상관 없이 ‘마루'〔宗·首〕란 고유어를 훈음차한 것이다. 이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馬)'자계 지명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말우물이 속해 있는 금의리는 그 지형이 거미를 닮아 생긴 이름이라 하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 노정(蘆井)·갈우물 (장안면 노진리)
예로부터 이 마을 앞 벌판에 갈대가 우거지고 좋은 우물이 있어 ‘갈우물'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조 말 행정명으로 대유정리(大有井里)라 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갈우물〔蘆井洞〕의 ‘蘆'와 참남기〔眞木洞〕의 ‘眞'을 따서 노진리가 되었다.
○ 구천(龜川)·구래 (장안면 덕다리)
이 마을 앞 냇가에 거북이가 놀았다 하여 거북내, 이를 한자말로 옮겨 구내〔龜川〕라 했는데 이 구내가 변음이 되어 ‘구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 흥천(興川) (장안면 사곡리)
모래골, 또는 모새골로 불리던 사곡리(沙谷里)에 딸린 지역으로 큰 내란 의미의 홍천(洪川)이 변질되어 지금처럼 흥천(興川)이 되었다.
○ 구동(口洞)·물구리 (장안면 장안리)
마을 앞 산기슭을 칭하는 이름으로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아 물골〔水谷〕로 불리었다는 설과, 옛날에 이 곳 마을 앞까지 밀물이 들어 왔기에 ‘물구리'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둘 다 맞는 해석으로 ‘구리'나 ‘골'은 같은 말로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뜻한다.
○ 온수곡(溫水谷)·온수골 (장안면 장안리)
장안리에 속한 이 마을은 이 곳의 샘물이 다른 곳보다 유독 따뜻하다 하여 처음부터 ‘온수골'이란 한자이름으로 불리었던 듯하다.
○ 놋우물 (우정면 매향리)
수식어로 쓰인 ‘놋-'의 뜻이 애매하나 일설에 의하면 일제 말 놋그릇 공출을 피하기 위해 마을 앞 공동우물 속에 그것을 감추었다는 설이 참고가 된다.
○ 운정동(雲井洞)·구름울 (우정면 운평리)
산이 구름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어 이렇게 ‘구름울'이라는 멋진 이름을 얻었다. 구름울이 속한 운평리는 운정리와 평전리의 합성지명이다.
○ 널우물 (우정면 원안리)
흔히 널판지를 우물 위에 깔았다고 하여 ‘널우물'이 되었다고 하나 그 본 뜻은 규모가 큰 곧 널따란 우물을 뜻하는 말이다.
○ 박우물 (우정면 주곡리)
이 우물은 그리 깊지 않아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여수동(麗水洞)·여술, 새터 (우정면 화수리)
전래지명이 ‘여술'인데 그 본뜻은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에 두 개의 큰 우물이 있었는데 한 곳에서는 뛰어난 장수가 나오고 다른 한 곳에서는 용마가 나왔다고 한다. 이 두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 또한 빼어나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화수리는 본래 수원부 사정면의 지역으로 새로 터를 잡고 꽃나무를 많이 심었으므로 새터, 신기(新基), 또는 화수라 불렀다 한다.
○ 분천리(汾川里) (봉담읍)
마을의 지형이 동이(盆)처럼 생겼다 하여 고려 때부터 분촌향(盆村鄕)으로 일컬어지다가 조선조 말에 분화촌(盆化村)으로 개칭되고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곳에 샘이 많다고 하여 분천리라 하여 ‘분'의 한자가 바뀌게 되었다.
○ 수기리(水機里)·수틀 (봉담읍)
흔히 말하길 정조 대왕이 선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정할 때 이 곳에 있는 금릉바위에서 잠시 쉬어갔으므로 쉬틀, 수틀, 또는 수기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낱 민간 어원설에 불과하고 이 이름은 ‘수틀'이란 기구를 만들던 데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 빈정(濱汀) (매송면 야목리)
이곳은 조선조 말부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바다를 끼고 있어 물가를 뜻하는 빈(濱)과 정(汀)이란 어려운 한자를 써서 지명으로 삼았다. 한편 야목은 본래 광주군 송동면 지역으로 들의 목〔項〕이 되므로 ‘들목'이라 부르던 곳을 차자 표기하였다.
○ 현천(玄川)·거무내 (매송면 야목리)
들목〔野牧〕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흐르는 시내의 이름을 따서 동명으로 삼았다. ‘거무내 >검내'는 비록 ‘검을·현(玄)'으로 차훈되고 있으나 냇물이 검은 게 아니라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시내'란 뜻인 ‘고마내/거무내 > 곰내/검내'(北川 또는 後川)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 어천리(漁川里)·어랑내 (매송면)
본래 매곡면에 속했던 곳으로 어랑내, 어량내(천)라 부른다. 한자로는 어랑천(於良川)으로 표기했는데 ‘於'를 ‘어'로 읽어 고기잡을·어(漁)로 바꿔 놓았다. 지명에 쓰이는 '어(於)‘자는 늘어지다란 뜻의 ‘느리-'로 읽혀지기 때문에 이 곳의 본래 명칭은 ‘느리내', 또는 ‘늣내'정도로 불려졌을 것이다.
○ 천천리(泉川里)·샘내, 샘내골 (매송면)
칠보산(七寶山)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항상 맑은 시냇물이 흐를 뿐 아니라 어디서나 샘이 솟는다 하여 샘내, 샘내골로 불렀는데 이를 그대로 한역(차훈)하여 천천리(泉川里)가 된 것이다.
○ 문호동(文湖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구리〔文起洞〕와 서호동(西湖洞)을 합병하여 문호리라 이름하였다. 서호는 ‘새미'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처음에는 몇 가호에 불과하던 곳이 바닷가에 언(뚝)을 쌓고 갯벌을 개간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 수화동(水花洞)
밀물이 드나들었다는 수충동(水充洞)과 ‘매고지'라 불리던 산화동(山花洞)이 병합하여 수화리가 되었다. 앞서 수차 언급한 매화리의 매화(梅花)와 더불어 물과 고지>곶이 결합한 화성을 대표할 수 있는 지명이다.
○ 원천동(遠泉洞)
‘원실'이라 불리던 원막동(遠幕洞)의 원(遠)과 ‘샘실'이라 불리던 천곡동(泉谷洞)의 천(泉)을 따서 원천리가 되었다. 먼 곳에 있는 막(幕)과 샘이 합하여 결과적으로 ‘먼 샘'이 되어버린 것이다.
○ 우정(雨井)·비우물 (서신면 상안리)
고려 때부터 이 지역에 뽕나무가 많았기에 상림원(桑林園)이라 칭했으나 이후 상림동(尙林洞)으로 바뀌고 다시 인근의 대안동(代安洞)과 병합하여 상안리(尙安里)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에서 비롯된 지명이 있는데 ‘비우물'과 ‘개물'〔蓋井〕이 바로 그것이다. 비우물(雨井)은 때로 비정촌(碑井村)이라 하여 비석을 뜻하는 ‘비(碑)'자를 쓰기도 한다. 이는 우물을 팔 때 비석이 나왔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개물의 개정(蓋井)은 이 곳이 명당 터라 하여 우물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덮을·개'(蓋)를 쓴다는 설이 있다.
○ 영지(靈池) (서신면 용두리)
신령스런 못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는데 확실치는 않다. 또한 이 못이 있는 마을을 영지촌이라 부른다.
○ 운천동(雲川洞)·구름내 (서신면 전곡리)
구봉산 앞 골짜기에 있는 앞실〔前谷〕에 딸린 마을인데 ‘구름내'란 멋진 시내의 이름을 동명으로 삼았다.
○ 고정리(古井里) (송산면)
‘고지의 안'(串內)이란 뜻의 고잔(古棧)동의 ‘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이란 뜻의 원정(遠井)동의 ‘정(井)'을 따서 고정리가 되었다.
○ 사강리(沙江里) (송산면)
본래 남양군 수산면 지역으로 전에는 이 곳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강처럼 변했으므로 사강(沙江)이라 이름 한 것 같다. 안사강(內沙江)과 바깥사강(外沙江 또는 新外洞)으로 나 뉜다.
○ 수산동(水山洞)·물미 (송산면 삼존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이 산이어서 ‘물뫼', ‘물미'라 불렀는데 이를 수산(水山)으로 한역하였다. ‘뫼/미'는 산을 뜻하기도 하지만 물을 뜻하는 고유어이기도 하다.
○ 쌍정리(雙井里) (송산면)
본래 남양군 세곶면에 속한 곳으로 ‘한우물'(大井)과 ‘덕우물'(德井, 또는 石井)의 두 우물에서 비롯되어 쌍정리(雙井里)라 이름하였다. 덕우물의 ‘덕' 역시 큰 것을 뜻하는 고유어이다.
○ 용수동(龍水洞)·용숫골·영개 (송산면 용포리)
용수(龍水)는 옛날 이 포구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용숫골과 신당이 있어 ‘당미'라 불리던 고포(羔浦)가 병합되어 지금의 용포리(龍浦里)가 되었다.
-출처 화성시사(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