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학연구소 연구위원
| 부서 | 성명 | 소속 및 직위 | 담당 분야 |
|---|---|---|---|
| 화성학연구소 | 심일종 소장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연구소 운영 총괄 |
| 정찬모 부소장 | 화성시지역학연구소장, 화성문화원 이사 | 지역 실무위원 총괄 | |
| 한동민 위원 | 화성시독립기념관 관장 | 지역학·독립운동사 분야 | |
| 김덕묵 위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 민속기록 분야 | |
| 최종성 위원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역사·종교 분야 | |
| 이관준 위원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 |
| 박재형 위원 |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 학술·향토문화 분야 |
제1장 개관 제4절 화성지역 주요 지명의 어원 2. 곶[串]에서 비롯된 이름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49
2. 곶[串]에서 비롯된 이름
1) 고지>곶(串 또는 花)의 지명 용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화성·수원 지역의 지형상의 특징이 서해 바다에 연하여 시내, 못, 우물, 저수지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았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못지 않게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 곳의 지형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바다나 물 쪽으로 가늘고도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을 가리켜 ‘곶’ (한자로는 岬, 또는 串)이라 부른다. 곶의 기원형은 어말모음을 보유한 ‘고지’로서 이 지역의 지명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지, 곧 곶은 주로 어떠한 ‘-곶’이라 하여 지명 접미사로 쓰이는 것이 통례지만 때로 수식어, 곧 접두사로 쓰이는 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곶의 안쪽이라면 ‘곶+안’의 구조가 되어 ‘고잔’이라 부르고 반면 바깥쪽이라면 ‘곶밖’으로 불리는 경우이다. 고잔은 현지명에서 한자로 고잔(古棧, 高棧, 古盞, 高盞) 등 다양하게 표기되는데 이 중에는 강화도(불은명 고릉리)의 한 곳은 이를 차훈(한역)하여 관내동(串內洞)이라 적는다.
곶안>고잔의 상대어는 고지밖>곶밖이 되겠는데 이를 관외〔串外〕라 적지 않고 엉뚱하게도 화전(花田)으로 적은 용례를 앞서 확인한 바 있다. 이는 ‘곶밖’을 의식적으로 ‘꽃밭’으로 생각하여 차훈 표기(정확히 말하여 훈음차(訓音借) 표기)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명의 차자표기에서 이왕이면 뜻이 좋은 한자를 쓰고 싶은 표기법상의 일종의 아역(雅譯)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대어의 꽃(花)은 중세어에서는 ‘곳’ 또는 ‘곶’으로 표기되었으니 이는 ‘ㄱ’이 아직 경음화 현상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고지의 준말 ‘곶’과 꽃의 옛말 ‘곶’이 어느 시기까지는 발음이 같았거나 유사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화성·수원의 지명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온통 꽃으로 뒤덮인 것처럼 많은 ‘화(花)’자계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지형상의 특징으로 인하여 그만큼 이곳에 곶(串)이 많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실지로 전국 지명사전을 분석해 보면 화(花)자, 즉 ‘곶’계 지명의 70% 이상이 화성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곶’계 지명 예를 찾아 화성의 바닷가로 떠나보기로 한다.
(1) 남양
○ 분지곶(粉知串)·분지고지, 분지곶 (문호동)
서호못 서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분지처럼 생겼기로 이를 분지섬이라 하고 그 섬에 있는 곶으로 된 마을을 분지곶동이라 한다.
○ 산화동(山花洞) (수화동)
수화(水花)는 수충(水充)과 산화(山花)의 합성 지명임은 앞서 밝힌 바 있다. 산화(山花)는 ‘뫼고지’, ‘뫼곶’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기서는 산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 고잔(古棧)·고잔 (신외리)
인천 옆에 있는 마을로서 곶의 안쪽이 된다.
○ 장곶동(長串洞)·장고지, 장곶 (장덕리)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 지역인데 행정구역 개편 때 장고지와 덕바위(매바위) 등을 병합하여 장덕리가 되었다.
○ 살구지 (활초동)
지형이 화살촉처럼 뾰족 솟아 있는 고지임으로 ‘살구지’라 불렀다. 활초란 이 살구(고)지를 차자 표기한 것이다.
(2) 서신면
○ 고잔(高棧)·고잔·꽃전 (궁평리)
궁평리의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쪽이 된다. 마을 앞 모래밭에 해당화가 피고 집집마다 꽃밭을 가꾸었기에 꽃전(花村)이 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고지안>고잔의 변이음에 지나지 않는다.
○ 매화리(梅花里)·맷골, 매곡
본래 남양군 신리면 지역으로 예전부터 ‘맷골’(梅谷 혹은 梅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지>곶 계 지명과 병합하여 매화(梅花)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이 산골짜기이므로 여기서의 매(梅)는 산을 뜻하는 뫼(山)로 해석하기도 한다.
○ 사곶리(仕串里)·벼슬고지(곶)
지형이 닭의 벼슬(鷄冠)을 닮아 ‘벼슬고지’라 불렀다 한다. 이 벼슬을 관직(官職)으로 생각하여 사곶(仕串)으로 차훈하였다. 벼슬>뱃은 또한 비스듬히 비탈진 지형을 일컫는 말로 쓰일 수도 있다.
○ 전곶(箭串) ·살고지 (송교리)
남양면 활초리의 살구지와 같은 뜻의 지명인 듯하다. 일설에는 살〔箭〕을 많이 단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잡던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당곶(唐串)·당고지 (전곡리)
삼국시대 당(唐)나라와의 무역선이 출입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양의 본이름 당성(唐城)과 같은 계통의 이름이다.
(3) 송산면
○ 고잔동(古棧洞)·고잔 (고정리, 고포리, 삼존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거지동(居芝洞)·거지 (지화리)
‘거지’는 고지의 변이음으로 보인다. 지화리(芝花里)는 삼국시대부터 당항진 포구가 있던 곳으로 구한 말 거지(居芝)의 지(芝)와 화량(花梁)의 화(花)를 딴 합성지명이다.
○ 화량진(花梁鎭) (지화리)
와룡산 남쪽으로 삼국시대부터 군대 주둔지로서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다. 화량(花梁)은 ‘고지들’ 의 차자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해변 마을을 뜻한다. 노량진(鷺梁津)이 노들나루로, 명량(鳴梁)이 울돌로 읽히는 것처럼 화량(花梁)의 량(梁)은 지명표기에서 ‘돌’ 또는 ‘들’로 읽히는 차자이다.
(4) 비봉면
○ 이화동(梨花洞)·배꾸지 「三花里」
배꼬지, 또는 배꾸지는 지형이 배(舟)처럼 생긴 곶이어서 붙은 이름인 것 같다. 배꼬지를 중심으로 ‘도팟골’이라 불리는 도화동(桃花洞)과 연화동(蓮花洞)의 세 ‘화(花)’자 계 지명을 합쳐 삼화리(三花里)가 되었다. 연화(蓮花)는 연꽃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형이 명당이라 일컫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5) 장안면
○ 고잔(古棧) (노진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계룡곶(鷄龍串)·계룡고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관곡(管谷)·멱구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화전(花田)·꽃바테, 꽃밭 (수촌리)
‘숲말’(水村) 서쪽에 있는 마을로 화전(花田)이라는 한자어 그대로 꽃밭이 아니고 고지의 밖(串外)을 뜻하는 이름이다.
○ 배향곡(拜向谷)·바람고지(곶) (어은리)
어은리에 딸린 거문들〔巨門坪〕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수령이나 방백들의 행차가 있을 때 삼괴(三槐) 지방의 유생들이 이 곳 곶까지 따라와 배행(陪行)하였다고 해서 ‘배행고지’라 불리던 것이 ‘바람고지’로 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명에 쓰인 ‘바람’은 지형이 비스듬하거나 비탈진 곳에 붙이는 말이다. 바람고지 역시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지를 뜻할 것이다.
○ 고잔(古棧) (장안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6) 정남면
○ 고지리(高支里)·고지물, 고주물
흔히 말하기를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고지(주)물’이라 불렀다고 하나 고지(串)가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7) 태안읍
○ 돌고지 (安寧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8) 팔탄면
○ 고잔(高棧) (노하리)
노하리(路下里)에 딸린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이었다. ‘안고잔’이라 불리는 내고잔(內高棧)과 가운데에 있는 ‘중고잔’(中高棧)으로 나뉜다.
○ 화당리(花塘里)·꽃당산
본래 수원(화성)군 공향(貢鄕)면 지역으로 꽃당산 밑이 되므로 꽃당산 또는 화당촌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꽃 역시 곶의 의미로 쓰인 말이다.
(9) 우정면
○ 고잔(古棧) (매향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이화리(梨花里)·배고지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어 주곡리(舟谷里)라 불렀는데 이 배(舟)란 말을 먹는 배(梨)로 훈음차하였다.
○ 맹곶(孟串)·맹곶 (이화리)
이 고을에 맹씨(孟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기에 ‘맹고지’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 사두곶 (이화리)
이전에 ‘사두질’을 하여 고기잡이를 하던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2) 꽃뫼(花山)의 전설

[사진-8. 융릉이 자리잡은 화산의 모습]
어떤 지명이든 그것이 지어진 유래가 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이름에 따른 재미 있고 유익한 전설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화성·수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기 지명에 따른 나름대로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화성(華城)의 기원이 된 화산(花山)의 전설만은 여기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설이란 게 그렇듯 으레 허구(虛構)이기 마련인데 이 꽃뫼의 그것만은 훗날 역사적인 사건과 전혀 무관치 않아 후세인들이 이를 새겨둘 필요가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해가 가까운 화성 땅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대신 산은 한결 같이 작고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꽃뫼'라 불리는 화산도 해발 1백 미터에 불과한 야산으로 옛날 이 산 밑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다고 한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 어부는 어느 날 고기잡이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어가던 한 여인을 구출한다.
어부에 의해 목숨을 구한 이 여인은 놀랍게도 지상의 온갖 꽃을 주관하는 천상의 선녀라고 했다. 바닷가 벼랑 끝에 매달려 시들어가는 한 꽃나무를 살리려다 그만 실족하여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이었다. 빈집에 소가 들어왔다는 옛 말은 이를 두고 말함인가.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홀아비에게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오다니. 선녀는 자신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한다면서 일 년 간 어부와 동거하기로 언약하고 화산 중턱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홀아비와 선녀 신부의 신혼은 정말 꿈같은 세월이었다. 신부는 꽃을 관장하는 선녀답게 이들의 보금자리는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로 장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여기다 선녀의 약속은 매정하리만치 철저하기만 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꼭 1년 만에 그녀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딸 하나만을 남긴 채 미련 없이 지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딸의 이름은 화심(花心)이라고 했는데 선녀 어머니를 닮아 그녀 역시 이름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생전 처음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선녀 아내가 떠나버린 이 공허한 세상 그러나 어찌하랴 비록 상심은 컸지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어부는 오로지 딸 화심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며 살았다.
세월은 흘러 화심이 성장하여 출가할 무렵에 이르러 아버지 어부는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밖에서는 미모의 화심을 탐내는 구혼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으나 그녀는 병든 아버지를 남겨 두고 저 혼자 시집갈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으레 등장하는 힘 있는 권력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구혼자 중에 변사또와 비슷한 타입의 이 고을 부사도 끼어 있었다. 막강한 권력 앞에 연약한 부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여기다 화심에게는 춘향이의 경우처럼 이도령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관가로 끌려가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진-9. 정조의 능행길 중 노송지대]
참으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화심의 처형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망나니의 칼날이 화심의 목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몸은 하늘로 치솟음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진다. 그녀의 절규는 마디마디 피가 되어 튀었고, 그 피가 순간적으로 새빨간 꽃비로 변하여 이내 땅위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꽃비로 내려 지상에 흩어진 그 꽃은 옛날 아버지가 선녀 어머니를 구할 때 그녀의 머리에 꽂아 주었던 바로 그 꽃이라고 했다.
뒤늦게 형장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딸의 시신 대신 그곳에 흩어진 꽃비를 수습하여 그들이 살던 산 밑 오두막집 곁에 묻었다. 꽃비가 쌓여서 이루어진 무덤, 그 ‘꽃뫼’를 후세 사람들은 화산(花山)이라 불러주게 되었고 훗날 이 화산 곁으로 성을 쌓게 되었으니 그 성을 화성(花城) 또는 화성(華城)이라 일컫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아버지를 외치던 절규가 꽃비가 되고, 그 꽃비가 쌓여 꽃뫼 즉 화산이 되었는데 그 화산에 훗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나란히 묻혔음은 이 무슨 기연일까?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한 전설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다니. 수원에서 병점을 거쳐 발안으로 가는 화산 중턱에 두 왕릉이 나란히 누워 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인 정조와 그 비를 합장한 건릉(健陵)이 바로 그 전설의 현장인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오늘의 수원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본래의 수원은 지금의 융·건릉과 그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있는 화산 주변이었다. 열 한 살의 어린 나이로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최후를 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선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 곳 화산으로 옮기고 해마다 능행길에 오르곤 했음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친의 묘를 굳이 이 곳 화산으로 옮긴 것은 정조가 꽃뫼의 전설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을까?
어떻든 정조는 아버지의 피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역 주변을 온통 꽃으로 장식하고 관리에 심혈을 기울었다. 능행길에 꼭 넘어야 했던 지지대(遲遲臺) 고개의 지명유래나 고개 밑 노송지대에서의 일화는 아버지를 흠모하는 정조의 효심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소나무 숲에 송충이 떼가 들끓었을 때 정조는 그 중 한 마리를 잡아 입 속에 넣고 씹으면서 이렇게 진노했다는 것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나 아버지를 위하는 과인의 충정을 이다지도 좀먹는단 말이냐!” 나라님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난데 없는 까마귀 떼가 몰려와 솔잎에 붙은 송충이를 모두 먹어치웠다던가. 어떻든 능행길은 눈물겨운 효행의 길이었고 그것을 임금은 만백성들에게 여실히 몸으로 보여주었다. 임금은 시흥을 지나 화산이 보이는 고개에 다다르면 “걸음이 왜 이렇게 더디냐”며 행군을 재촉했고, 참배가 끝나 환궁할 때면 “제발 좀 천천히 가자”면서 수 십 번이나 선친의 유택 쪽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래서 이름 붙어진 ‘지지대’(遲遲臺) 고개와 함께 선친의 내세 평안을 기원한다는 안양의 만안교(萬安橋)도 정조의 효행길이 남긴 유적이 되었다.
꽃뫼의 전설과 정조대왕의 효행 사적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이 전설과 사적은 후세인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그대로 믿고 싶은 이야기이다. 교육적인 견지에서도 학생들로 하여금 융·건릉이나 용주사 관람을 권장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꽃뫼(화산)의 전설도 아울러 들려주었으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수원, 화성은 영원한 ‘효(孝)의 성곽 고을'로 우리의 가슴 속에 자리 매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융·건릉을 품속에 안고 있는 꽃뫼〔花山〕말고도 바로 인근에 또 다른 꽃뫼가 있고, 여기에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꽃뫼 즉 화산(花山)은 수원시 화서 2동 391번지 일대의 ‘꼴미', ‘꽃미', ‘꼴뫼' 등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화서 전철역에서 서울 쪽으로 향해 바로 왼쪽에 아파트 숲이 펼쳐 있고 그 사이로 언덕 같은 작은 산이 오뚝 솟아 있는데 꽃뫼는 두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철로 쪽의 것을 ‘큰 봉재', 서쪽의 것을 ‘작은 봉재'라 부른다. 이 곳에 수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 김씨를 비롯한 30여 호의 집들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다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곳의 꽃뫼 전설은 앞서 소개한 것보다 극적인 효과도 적고 재미도 훨씬 덜한 편이다.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이 마을 처녀가 이웃집 총각한테 몸을 더럽히자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고, 처녀의 시신이 묻힌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기에 이 산을 꽃뫼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평범한 얘기일 뿐이다. 얼마 전에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 곳이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화산은 어디까지나 융·건릉을 안고 있는 화산이 되어야겠고, 또 정조의 효심(孝心)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라도 화심(花心) 처녀의 전설을 되새기는 편이 더 의미가 있을 듯 싶다.
1) 고지>곶(串 또는 花)의 지명 용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화성·수원 지역의 지형상의 특징이 서해 바다에 연하여 시내, 못, 우물, 저수지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았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못지 않게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 곳의 지형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바다나 물 쪽으로 가늘고도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을 가리켜 ‘곶’ (한자로는 岬, 또는 串)이라 부른다. 곶의 기원형은 어말모음을 보유한 ‘고지’로서 이 지역의 지명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지, 곧 곶은 주로 어떠한 ‘-곶’이라 하여 지명 접미사로 쓰이는 것이 통례지만 때로 수식어, 곧 접두사로 쓰이는 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곶의 안쪽이라면 ‘곶+안’의 구조가 되어 ‘고잔’이라 부르고 반면 바깥쪽이라면 ‘곶밖’으로 불리는 경우이다. 고잔은 현지명에서 한자로 고잔(古棧, 高棧, 古盞, 高盞) 등 다양하게 표기되는데 이 중에는 강화도(불은명 고릉리)의 한 곳은 이를 차훈(한역)하여 관내동(串內洞)이라 적는다.
곶안>고잔의 상대어는 고지밖>곶밖이 되겠는데 이를 관외〔串外〕라 적지 않고 엉뚱하게도 화전(花田)으로 적은 용례를 앞서 확인한 바 있다. 이는 ‘곶밖’을 의식적으로 ‘꽃밭’으로 생각하여 차훈 표기(정확히 말하여 훈음차(訓音借) 표기)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명의 차자표기에서 이왕이면 뜻이 좋은 한자를 쓰고 싶은 표기법상의 일종의 아역(雅譯)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대어의 꽃(花)은 중세어에서는 ‘곳’ 또는 ‘곶’으로 표기되었으니 이는 ‘ㄱ’이 아직 경음화 현상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고지의 준말 ‘곶’과 꽃의 옛말 ‘곶’이 어느 시기까지는 발음이 같았거나 유사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화성·수원의 지명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온통 꽃으로 뒤덮인 것처럼 많은 ‘화(花)’자계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지형상의 특징으로 인하여 그만큼 이곳에 곶(串)이 많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실지로 전국 지명사전을 분석해 보면 화(花)자, 즉 ‘곶’계 지명의 70% 이상이 화성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곶’계 지명 예를 찾아 화성의 바닷가로 떠나보기로 한다.
(1) 남양
○ 분지곶(粉知串)·분지고지, 분지곶 (문호동)
서호못 서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분지처럼 생겼기로 이를 분지섬이라 하고 그 섬에 있는 곶으로 된 마을을 분지곶동이라 한다.
○ 산화동(山花洞) (수화동)
수화(水花)는 수충(水充)과 산화(山花)의 합성 지명임은 앞서 밝힌 바 있다. 산화(山花)는 ‘뫼고지’, ‘뫼곶’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기서는 산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 고잔(古棧)·고잔 (신외리)
인천 옆에 있는 마을로서 곶의 안쪽이 된다.
○ 장곶동(長串洞)·장고지, 장곶 (장덕리)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 지역인데 행정구역 개편 때 장고지와 덕바위(매바위) 등을 병합하여 장덕리가 되었다.
○ 살구지 (활초동)
지형이 화살촉처럼 뾰족 솟아 있는 고지임으로 ‘살구지’라 불렀다. 활초란 이 살구(고)지를 차자 표기한 것이다.
(2) 서신면
○ 고잔(高棧)·고잔·꽃전 (궁평리)
궁평리의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쪽이 된다. 마을 앞 모래밭에 해당화가 피고 집집마다 꽃밭을 가꾸었기에 꽃전(花村)이 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고지안>고잔의 변이음에 지나지 않는다.
○ 매화리(梅花里)·맷골, 매곡
본래 남양군 신리면 지역으로 예전부터 ‘맷골’(梅谷 혹은 梅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지>곶 계 지명과 병합하여 매화(梅花)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이 산골짜기이므로 여기서의 매(梅)는 산을 뜻하는 뫼(山)로 해석하기도 한다.
○ 사곶리(仕串里)·벼슬고지(곶)
지형이 닭의 벼슬(鷄冠)을 닮아 ‘벼슬고지’라 불렀다 한다. 이 벼슬을 관직(官職)으로 생각하여 사곶(仕串)으로 차훈하였다. 벼슬>뱃은 또한 비스듬히 비탈진 지형을 일컫는 말로 쓰일 수도 있다.
○ 전곶(箭串) ·살고지 (송교리)
남양면 활초리의 살구지와 같은 뜻의 지명인 듯하다. 일설에는 살〔箭〕을 많이 단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잡던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당곶(唐串)·당고지 (전곡리)
삼국시대 당(唐)나라와의 무역선이 출입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양의 본이름 당성(唐城)과 같은 계통의 이름이다.
(3) 송산면
○ 고잔동(古棧洞)·고잔 (고정리, 고포리, 삼존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거지동(居芝洞)·거지 (지화리)
‘거지’는 고지의 변이음으로 보인다. 지화리(芝花里)는 삼국시대부터 당항진 포구가 있던 곳으로 구한 말 거지(居芝)의 지(芝)와 화량(花梁)의 화(花)를 딴 합성지명이다.
○ 화량진(花梁鎭) (지화리)
와룡산 남쪽으로 삼국시대부터 군대 주둔지로서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다. 화량(花梁)은 ‘고지들’ 의 차자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해변 마을을 뜻한다. 노량진(鷺梁津)이 노들나루로, 명량(鳴梁)이 울돌로 읽히는 것처럼 화량(花梁)의 량(梁)은 지명표기에서 ‘돌’ 또는 ‘들’로 읽히는 차자이다.
(4) 비봉면
○ 이화동(梨花洞)·배꾸지 「三花里」
배꼬지, 또는 배꾸지는 지형이 배(舟)처럼 생긴 곶이어서 붙은 이름인 것 같다. 배꼬지를 중심으로 ‘도팟골’이라 불리는 도화동(桃花洞)과 연화동(蓮花洞)의 세 ‘화(花)’자 계 지명을 합쳐 삼화리(三花里)가 되었다. 연화(蓮花)는 연꽃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형이 명당이라 일컫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5) 장안면
○ 고잔(古棧) (노진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계룡곶(鷄龍串)·계룡고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관곡(管谷)·멱구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화전(花田)·꽃바테, 꽃밭 (수촌리)
‘숲말’(水村) 서쪽에 있는 마을로 화전(花田)이라는 한자어 그대로 꽃밭이 아니고 고지의 밖(串外)을 뜻하는 이름이다.
○ 배향곡(拜向谷)·바람고지(곶) (어은리)
어은리에 딸린 거문들〔巨門坪〕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수령이나 방백들의 행차가 있을 때 삼괴(三槐) 지방의 유생들이 이 곳 곶까지 따라와 배행(陪行)하였다고 해서 ‘배행고지’라 불리던 것이 ‘바람고지’로 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명에 쓰인 ‘바람’은 지형이 비스듬하거나 비탈진 곳에 붙이는 말이다. 바람고지 역시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지를 뜻할 것이다.
○ 고잔(古棧) (장안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6) 정남면
○ 고지리(高支里)·고지물, 고주물
흔히 말하기를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고지(주)물’이라 불렀다고 하나 고지(串)가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7) 태안읍
○ 돌고지 (安寧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8) 팔탄면
○ 고잔(高棧) (노하리)
노하리(路下里)에 딸린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이었다. ‘안고잔’이라 불리는 내고잔(內高棧)과 가운데에 있는 ‘중고잔’(中高棧)으로 나뉜다.
○ 화당리(花塘里)·꽃당산
본래 수원(화성)군 공향(貢鄕)면 지역으로 꽃당산 밑이 되므로 꽃당산 또는 화당촌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꽃 역시 곶의 의미로 쓰인 말이다.
(9) 우정면
○ 고잔(古棧) (매향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이화리(梨花里)·배고지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어 주곡리(舟谷里)라 불렀는데 이 배(舟)란 말을 먹는 배(梨)로 훈음차하였다.
○ 맹곶(孟串)·맹곶 (이화리)
이 고을에 맹씨(孟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기에 ‘맹고지’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 사두곶 (이화리)
이전에 ‘사두질’을 하여 고기잡이를 하던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2) 꽃뫼(花山)의 전설

[사진-8. 융릉이 자리잡은 화산의 모습]
어떤 지명이든 그것이 지어진 유래가 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이름에 따른 재미 있고 유익한 전설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화성·수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기 지명에 따른 나름대로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화성(華城)의 기원이 된 화산(花山)의 전설만은 여기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설이란 게 그렇듯 으레 허구(虛構)이기 마련인데 이 꽃뫼의 그것만은 훗날 역사적인 사건과 전혀 무관치 않아 후세인들이 이를 새겨둘 필요가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해가 가까운 화성 땅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대신 산은 한결 같이 작고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꽃뫼'라 불리는 화산도 해발 1백 미터에 불과한 야산으로 옛날 이 산 밑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다고 한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 어부는 어느 날 고기잡이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어가던 한 여인을 구출한다.
어부에 의해 목숨을 구한 이 여인은 놀랍게도 지상의 온갖 꽃을 주관하는 천상의 선녀라고 했다. 바닷가 벼랑 끝에 매달려 시들어가는 한 꽃나무를 살리려다 그만 실족하여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이었다. 빈집에 소가 들어왔다는 옛 말은 이를 두고 말함인가.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홀아비에게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오다니. 선녀는 자신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한다면서 일 년 간 어부와 동거하기로 언약하고 화산 중턱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홀아비와 선녀 신부의 신혼은 정말 꿈같은 세월이었다. 신부는 꽃을 관장하는 선녀답게 이들의 보금자리는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로 장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여기다 선녀의 약속은 매정하리만치 철저하기만 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꼭 1년 만에 그녀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딸 하나만을 남긴 채 미련 없이 지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딸의 이름은 화심(花心)이라고 했는데 선녀 어머니를 닮아 그녀 역시 이름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생전 처음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선녀 아내가 떠나버린 이 공허한 세상 그러나 어찌하랴 비록 상심은 컸지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어부는 오로지 딸 화심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며 살았다.
세월은 흘러 화심이 성장하여 출가할 무렵에 이르러 아버지 어부는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밖에서는 미모의 화심을 탐내는 구혼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으나 그녀는 병든 아버지를 남겨 두고 저 혼자 시집갈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으레 등장하는 힘 있는 권력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구혼자 중에 변사또와 비슷한 타입의 이 고을 부사도 끼어 있었다. 막강한 권력 앞에 연약한 부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여기다 화심에게는 춘향이의 경우처럼 이도령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관가로 끌려가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진-9. 정조의 능행길 중 노송지대]
참으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화심의 처형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망나니의 칼날이 화심의 목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몸은 하늘로 치솟음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진다. 그녀의 절규는 마디마디 피가 되어 튀었고, 그 피가 순간적으로 새빨간 꽃비로 변하여 이내 땅위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꽃비로 내려 지상에 흩어진 그 꽃은 옛날 아버지가 선녀 어머니를 구할 때 그녀의 머리에 꽂아 주었던 바로 그 꽃이라고 했다.
뒤늦게 형장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딸의 시신 대신 그곳에 흩어진 꽃비를 수습하여 그들이 살던 산 밑 오두막집 곁에 묻었다. 꽃비가 쌓여서 이루어진 무덤, 그 ‘꽃뫼’를 후세 사람들은 화산(花山)이라 불러주게 되었고 훗날 이 화산 곁으로 성을 쌓게 되었으니 그 성을 화성(花城) 또는 화성(華城)이라 일컫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아버지를 외치던 절규가 꽃비가 되고, 그 꽃비가 쌓여 꽃뫼 즉 화산이 되었는데 그 화산에 훗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나란히 묻혔음은 이 무슨 기연일까?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한 전설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다니. 수원에서 병점을 거쳐 발안으로 가는 화산 중턱에 두 왕릉이 나란히 누워 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인 정조와 그 비를 합장한 건릉(健陵)이 바로 그 전설의 현장인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오늘의 수원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본래의 수원은 지금의 융·건릉과 그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있는 화산 주변이었다. 열 한 살의 어린 나이로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최후를 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선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 곳 화산으로 옮기고 해마다 능행길에 오르곤 했음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친의 묘를 굳이 이 곳 화산으로 옮긴 것은 정조가 꽃뫼의 전설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을까?
어떻든 정조는 아버지의 피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역 주변을 온통 꽃으로 장식하고 관리에 심혈을 기울었다. 능행길에 꼭 넘어야 했던 지지대(遲遲臺) 고개의 지명유래나 고개 밑 노송지대에서의 일화는 아버지를 흠모하는 정조의 효심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소나무 숲에 송충이 떼가 들끓었을 때 정조는 그 중 한 마리를 잡아 입 속에 넣고 씹으면서 이렇게 진노했다는 것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나 아버지를 위하는 과인의 충정을 이다지도 좀먹는단 말이냐!” 나라님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난데 없는 까마귀 떼가 몰려와 솔잎에 붙은 송충이를 모두 먹어치웠다던가. 어떻든 능행길은 눈물겨운 효행의 길이었고 그것을 임금은 만백성들에게 여실히 몸으로 보여주었다. 임금은 시흥을 지나 화산이 보이는 고개에 다다르면 “걸음이 왜 이렇게 더디냐”며 행군을 재촉했고, 참배가 끝나 환궁할 때면 “제발 좀 천천히 가자”면서 수 십 번이나 선친의 유택 쪽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래서 이름 붙어진 ‘지지대’(遲遲臺) 고개와 함께 선친의 내세 평안을 기원한다는 안양의 만안교(萬安橋)도 정조의 효행길이 남긴 유적이 되었다.
꽃뫼의 전설과 정조대왕의 효행 사적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이 전설과 사적은 후세인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그대로 믿고 싶은 이야기이다. 교육적인 견지에서도 학생들로 하여금 융·건릉이나 용주사 관람을 권장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꽃뫼(화산)의 전설도 아울러 들려주었으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수원, 화성은 영원한 ‘효(孝)의 성곽 고을'로 우리의 가슴 속에 자리 매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융·건릉을 품속에 안고 있는 꽃뫼〔花山〕말고도 바로 인근에 또 다른 꽃뫼가 있고, 여기에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꽃뫼 즉 화산(花山)은 수원시 화서 2동 391번지 일대의 ‘꼴미', ‘꽃미', ‘꼴뫼' 등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화서 전철역에서 서울 쪽으로 향해 바로 왼쪽에 아파트 숲이 펼쳐 있고 그 사이로 언덕 같은 작은 산이 오뚝 솟아 있는데 꽃뫼는 두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철로 쪽의 것을 ‘큰 봉재', 서쪽의 것을 ‘작은 봉재'라 부른다. 이 곳에 수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 김씨를 비롯한 30여 호의 집들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다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곳의 꽃뫼 전설은 앞서 소개한 것보다 극적인 효과도 적고 재미도 훨씬 덜한 편이다.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이 마을 처녀가 이웃집 총각한테 몸을 더럽히자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고, 처녀의 시신이 묻힌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기에 이 산을 꽃뫼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평범한 얘기일 뿐이다. 얼마 전에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 곳이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화산은 어디까지나 융·건릉을 안고 있는 화산이 되어야겠고, 또 정조의 효심(孝心)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라도 화심(花心) 처녀의 전설을 되새기는 편이 더 의미가 있을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