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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1절 남양동(南陽洞)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45
제3장 마을이름

제1절 남양동(南陽洞)

본래 남양군의 지역으로 음덕면(陰德面)이라 하여 9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인천부 이포면의 10개 동리를 화척지면에 편입하고, 1914년 3월 1일 군면 통·폐합에 따라 상동, 중동, 하동, 북동을 병합하여 남양리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화척지면의 4개 동리와 둔지곶면의 8개 동리를 병합하여 음덕면이라 하여 수원군에 편입되어 15개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9년 8월 12일 경기도령 제8호에 의하여 남양면으로 고쳐졌다. 2001년 3월 21일 화성시 승격과 동시에 남양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15개 동의 사무를 관할하게 되었다.

1. 남양동

○ 구억말 : 수작이 서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다.
○ 글판이〔문판동(文板洞), 문관동(文官洞)〕 : 남양 서쪽에 있는 마을로 남양향교가 있어서 성균관 제학 등이 학문을 수학했다고 하여 글판이라 불리다가 문판동이 되었으며 일명 행가울 또는 하나문이라고 불려왔다. 지금도 향교가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되었다. 해마다 춘추석전 때는 남양, 마도, 송산, 서신., 팔탄, 우정 등지의 유림들이 행사에 참석하여 유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 글판이 고개 : 글판이에서 마도면 두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기곡동(基谷洞)〔터골〕 : 남양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터골(基谷)이라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기곡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양 홍씨 사당과 윤계선생 순절비가 있다.
○ 남양제1교(南陽第一橋) : 남양 동북쪽에 있는 다리이다.
○ 남양제2교 : 남양 서쪽에 있는 다리이다.
○ 문례동(文禮洞) : 남양 동남쪽에 있는 마을. 남양향교가 있었다.

○ 범골〔호곡(虎谷)〕 : 남양동에 있는 골짜기로 범이 있었다고 한다.
○ 북동〔수작동(壽爵洞, 受爵洞), 수제기〕 : 남양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고을에서 원님이 두 사람 나왔다고 해서 수작동(受爵洞) 또는 수작이라고도 한다.
○ 상동(上洞) : 조선조 때 고을 원이 머무는 관아를 중심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 중동(中洞) : 남양리 중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동이라 하였다.
○ 북동(北洞) : 남양리 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동이라 하였다.
○ 하동(下洞) : 관아를 중심으로 아래쪽 마을로 상동과 하동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하였다.
○ 새말〔새마을〕 : 역골 남동쪽에 새로 된 마을로 1962년 미국 유도탄 중대가 주둔하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 때부터 새마을로 불러 왔다.
○ 안동굴 : 남양동에 있는 마을이다.
○ 엄실 : 남양동에 있는 마을이다.
○ 역골〔역곡동(驛谷洞), 와룡동(臥龍洞)〕 : 남양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때 해문역(海門驛)이 있다가 마도면 해문리 구화로 옮겼다. 1666년(현종 7)에 창건하여 한나라 승상 와룡 제갈량, 문정공, 호안국, 충간공 윤계를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헐렸다는 와룡당(臥龍堂)이 있었다고 하며 용이 누운 모습이라는 뜻으로 붙였다고도 한다.
○ 오리장 : 오리장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 오리정(五里亭) : 상동에 있는 정자이다.
○ 옥곡〔옥곡(獄谷), 옥골, 옥터골〕 : 남양동에 있는 골짜기로 남양부의 옥이 있었다고 한다.
○ 은장〔은곡(銀谷), 은골〕 : 글판이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하라무니 : 남양동에 있는 마을이다.
○ 한가울〔행가울〕 : 글판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 개울가가 된다.
○ 향교리 : 남양 동남쪽에 있는 남양향교의 터로 현재 남양 고등학교가 되었다.

2. 무송동(茂松洞)〔수리재, 술재, 술현, 무송〕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무성한 고개 밑이므로 수리재, 술재, 또는 술현, 무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정골, 장수터를 병합하여 무송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어 무송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술현(術峴)〔장술동(長術洞), 장수동(長壽洞), 장수터〕 : 이 곳에 술현이란 고개가 있어 술현동이라 불렀고, 또 산맥이 길게 뻗어 내렸다고 하여 장술동(長術洞)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이 곳은 공기가 좋고 산수가 맑아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서 장수촌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 안정골〔안정곡(安靜谷), 안정동(安靜洞), 안장곡(골)(鞍裝谷)〕 : 술재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세와 마을의 형국이 말을 타고 있는 형국에 말안장과 비슷하다고 하여 안장골로 불리었으며 조선조 말에는 신정동(新靜洞)이란 행정 리명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무송동으로 통합되면서 안장골의 안자와 신정동의 정자를 따서 안정동(安靜洞)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 장수(長壽)터 : 술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3. 문호동(文湖洞)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지동, 서호동, 문기동을 병합하여 문기동의 문(文)자와 서호동의 호(湖)자를 따서 이름을 문호동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옛부터 해안에 접해 있어 바닷물이 많이 드나들던 곳으로 호수가 늘고 사람이 점차 늘어나면서 글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이들이 정착하는 데 좋은 포구로 발전되었다.
○ 닥말 : 문기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문기동(文起洞) : 서호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산속에 위치한 벽촌이 있으나 서당과 글 읽는 선비가 많이 나와 문기동·또는 문구리로 불리었다고 전하나 산속에 위치한 마을이 아니고 바닷가 마을로써 물골이 변하여 문굴로 변하고 다시 문구리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 분지고지〔분지곶(粉知串), 분지곶동(粉知串洞)〕 : 분지섬에 있는 마을로 곶으로 되었다.
○ 분지섬 : 서호못 서쪽에 있는 작은섬으로 높이 37m이며 바닷가가 곶으로 되었다.
○ 서호동(西湖洞) : 새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해변에 접해 있다. 바닷가에 제방을 쌓고 수운을 설치하여 호수 안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때 경관이 극치에 달하여 장관을 이루므로 서호동이라 하였다 한다.
○ 새미(샘) : 문기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좋은 샘이 있었다고 한다.
○ 서호(西湖) 못 : 서호동 서쪽에 있는 못이다.
○ 서호염전(西湖鹽田) : 서호동 서쪽에 있는 염밭이다.

4. 북양동(北陽洞)

서미동(鼠尾洞)으로 불리어 오다가 서미동(瑞美洞)으로 고치었고 그 후 고서미동으로 불려오다가 남양에 준하여 그 위치가 북쪽이라 하여 남양의 양(陽)자를 따서 북양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본래 남양군 음덕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서미동, 서미동을 병합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광산동(鑛山洞) : 남양 광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말 때 중석(重石) 광산이 개발되면서부터 광산리로 불리어졌다.
○ 벗말〔평촌(坪村)〕 : 소래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에는 이 곳까지 갯물이 드나들어 벗(염전)이 있었다고 한다.
○ 서미동(瑞美洞) : 소래밭이라고도 하며 북양동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 아낙굴 : 봉림사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다.
○ 안산(案山) : 소래밭에 있는 산이다.
○ 애산묘〔이인묘〕 : 영치고개 서쪽에 있는 애국지사 겸 정치가 애산 이인(李仁)의 무덤이다.
○ 양지촌(陽地村)〔양지, 양지말〕 : 소래밭 양지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방향이 양지바른 남향으로 되어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 염치동(廉峙洞)〔염치곡(廉峙谷), 영치굴〕 : 염치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에 불당골이라는 곳에 절이 있었는데 폐사(廢寺)가 된 후에 한 때는 불당골(佛堂谷)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주민들이 그 절을 잊지 말고 염두에 두라는 뜻에서 염티고개(영티고개, 염칫고개, 영칫고개 : 북양동에서 비봉면 양로리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 오리정(五里亭)〔오리장〕 : 북양동에 있는 마을이다. 오리정(남양동에서 5리 되는 지점에 있는 정자)이 있었다고 한다.
○ 왕석굴 : 북양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 중말 : 양지 서쪽에 있는 마을로 북양동 양지와 송림동 양지 중간이 된다.
○ 짐꿀골짜기 : 북양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 함바리굴 : 북양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5. 송림동(松林洞)

본래 남양군 화척지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무성하였으므로 송림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밭뒷말, 정씨촌, 잔다리, 양지촌, 삼부실을 병합하여 송림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산골짝의 평지의 전답에 항상 물이 흐르고 흉년을 맞은 적이 없을 정도로 산수가 좋아 미질(米質)이 좋기로 이름이 나있다.

○ 밭뒷말 : 송림동에 있는 마을로 밭 뒤가 되어 이름 지어졌다.
○ 삼부실(三富室) : 송림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중엽 이 마을에 산 한내시, 정내시, 이내시의 세 내시(內侍)가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데서 ‘삼부실동’으로 불러졌다고 한다.
○ 양지촌(陽地村) : 송림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때 양등간처(楊等干處)가 있었다.
○ 잔다리 : 송림동에 있는 마을이다.
○ 정씨촌(鄭氏村) : 송림동에 있는 마을로 정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6. 수화동(水花洞)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화동, 수충동, 양철리를 병합하여 수충동의 수(水)자와 산화동의 화(花)자의 이름을 따서 수화동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무덤실 : 수충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 산화동(山花洞) : 수화동에 있는 마을로 산에 아름다운 꽃이 많다고 한다.
○ 수충동(水充洞)〔물충골〕 : 양철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중엽까지 이 곳에 밀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제방을 쌓고 사람이 살게 되면서부터 ‘물충골’ 또는 ‘수충동’이라 했다고 한다.
○ 안골 : 수충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양철동(良哲洞)〔양처리, 양철이〕 : 수화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조 중엽 병자호란 때 전사한 문충공(文忠公) 박씨의 자손이 이 곳에 낙향해 살면서 수심정기(修心正氣)에 유의하여 어질고 착하게 살라는 뜻에서 ‘양철동’ 또는 ‘양철리’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7. 시동(匙洞)〔수리〕

마을 형국이 마치 ‘숟가락과 흡사하다’고 하여 시리(匙里)라 하였다 한다. 본래 남양군 화척지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숟가락처럼 생겼으므로 수리 또는 시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포동을 병합하여 시리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외포동(外浦洞)〔외포(外浦), 밖개〕 : 밖개 가에 있는 마을이다. 문호동 방향으로 다니지만 비봉면 남전리를 경계로 왕래할 당시 배가 드나들고 바닷물이 마을에 닿아 바다에 접해 있기 때문에 ‘밖에’ 또는 외포동(外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 행촌(杏村)〔향촌〕 : 수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살구나무가 많았다 한다.​

8. 신남동(新南洞)

본래 남양군 음덕리면의 지역인데 해변에 접하고 있어 이 포구를 이룰 당시 여러 이름으로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문동, 신남동, 신양동을 병합하여 신양과 산남(산양동)의 이름을 따서(남양에서 남부에 있다하여 남자를 따서) 신남동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당재〔당현(堂峴), 당현동(堂峴洞)〕: 당재(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이 마을 고개에는 마을의 행운을 빌고 제사를 지내는 당집이 있어 ‘당재고개`’ 라고 불렀다.

○ 돌문안〔石門洞〕 : 신양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어귀에 돌이 문처럼 되어 있었다고 한다.
○ 대촌동(大村洞) : 예부터 이 마을에는 나주정씨(羅州鄭氏)가 대성을 이루며 큰 마을로 발전했다고 해서 대촌동(大村洞)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 매호동(梅湖洞)〔매호(梅湖)〕 : 신양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애당초에는 마을 안에 호수가 있었다고 하며 마을 앞에는 바닷물이 드나들고 산에는 나무가 우거져서 호수 주위가 마치 보는 이로 하여금 매화꽃이 핀 것처럼 운치가 있어 그 절경에 탄복하여 매호라 하였고, 마을은 매호동이라 하였다.
○ 산남동(山南洞)〔산양동(山陽洞)〕 : 신양동 옆에 있는 마을이다.
○ 신양동(新陽洞) : 신남동에서 가장 큰 마을. 마을 뒤로는 고추봉이 자리 잡고 산수 또한 좋을 뿐 아니라 마을의 좌향이 남향인 양지향(陽地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신양동’`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쌍송교(雙松僑) : 매호 앞에 있는 다리이다.
○ 외마니 : 당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9. 신외동(新外洞)〔인천, 남양인천〕

예부터 포구를 이룬 마을로서 구한말에는 지형이 인천과 닮았다 하여 남양인천(南陽仁川)으로 불리다가 인천항이 발전함에 따라 ‘신외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해변 일부를 막아 경작을 하여 천석 이상을 경작한 거부 박오위장(朴五衛將)이 살았다.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인하여 농지가 분배되어 지금은 자손이 살아 갈 수 있을 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서 인천 또는 남양인천이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잔, 화수개, 내동, 중동, 외동을 병합하여 신외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고잔(古棧) : 인천 옆에 있는 마을로 곶으로 되어 있다.
○ 내동(內洞)〔안동네〕 : 중동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곳은 북쪽 갯벌을 끼고 반월면 쪽으로 접해 있는 마을로 ‘내동’또는 ‘안동네’라고 불렀고 육지가 접해 있는 곳은 ‘바깥동네’ 곧 ‘외동’이라 하였다.
○ 바깥동네〔외동(外洞)〕 : 인천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 중동(中洞) : 인천 복판의 마을이다.
○ 화수개 : 인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10. 안석동(安石洞)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의동과 거석동을 병합하여 안의동(安儀洞)의 안(安)자와 거석동(擧石洞)의 석(石)자를 따서 안석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하였다.
○ 거석(擧石)〔擧石洞, 들돌)〕 : 안석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들린 돌이 있었다.
○ 뒷들〔후평(後坪), 후평동(後坪洞) : 들돌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아의굴〔안의동(安儀洞)〕 : 들돌 옆에 있는 마을이다.

11. 원천동(遠泉洞)

본래 남양군 화척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왕의 마을 이름 ‘원모동’(遠慕洞)의 원(遠)자와 ‘천곡동’(泉谷洞)의 천(泉)자를 따서 원천동이라고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 개묵(開默)〔개묵동(開默洞)〕 : 원막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샘실〔천곡동(泉谷洞)〕 : 원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샘이 있다.
○ 원막(遠幕)〔원실〕 : 원천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옛부터 ‘원실’(遠室) 이라 불러왔으나 일막(日幕)이 되면 서쪽 산이 마치 병풍과 같고 포장 친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는 뜻에서 원실의 원(遠)자와 일막의 모(暮)자를 따서 ‘원모동’이라 했다고 한다.

12. 온석동(溫石洞)〔원두루지, 온석굴〕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의 지역으로서 배로 돌을 날라다가 돌로 회를 구웠으므로 원두루지, 온석굴 또는 온석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기동을 병합하여 온석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옛날 갯벌로 이루어진 이 곳은 마을 앞을 바닷물이 드나들 때 배가 마을 앞에 와서 정착을 하면 마을사람들이 생활이 어려워 타지에서 돌을 날라다가 회를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여 온석동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배가 드나들던 갯벌은 간척사업으로 온석동에서 팔탄면 노하리로 제방을 막아 대성저수지와 함께 큰 농장으로 기름진 옥답이 조성되어 있다.
○ 달기터〔월기동(月基洞)〕 : 원두루지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동산에서 해마다 망월을 보았다고 하며 월기동 뒷산에 백로, 왜가리가 해마다 수천마리씩 날아와 새끼를 치고 저녁노을이 질 때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 장수터 : 온석동에 있는 마을로 산과 물이 맑아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13. 장덕동(長德洞)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곶동, 덕방동, 바위삼, 매바위를 병합하여 장곶과 덕방의 이름을 따서 장덕동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옛부터 번화한 포구로서 조선초에는 장곶면(長串面)의 중심 마을을 이루었다.

○ 덕방(德房)〔덕뺑이〕 : 옛부터 남양방씨(南陽方氏)의 집성촌으로 방둔지(方屯地)로 불려오다 그 후 덕방동(德房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풀무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응암동(鷹岩洞)〔매바위, 덕바위〕 : 매봉재에서 매를 놓아 매가 바위로 날라갔음으로 매바위(鷹岩)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 응암동(鷹岩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암삼(岩三)〔바위삼〕 : 바닷가에 접해 있는 이 마을은 북서향으로 3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있어 바위삼 또는 암삼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 잡재기 : 바위삼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장고지〔장곶(長串), 장곶동(長串洞)〕 : 바위삼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긴 곶으로 되어 있다.
○ 풀무골〔치동(治洞)〕 : 바위삼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14. 장전동(獐田洞)〔장전, 장전굴〕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노루처럼 생겼으므로 장전, 장전굴, 장전동이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이터, 정자동, 무덤실을 병합하여 장전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중엽에 사냥꾼이 많이 모여들고 마을 한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의 형태가 마치 노루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동이터 : 장전동에 있는 마을이다.
○ 반송(盤松, 畔松)〔뱅송〕 : 옛부터 이곳에는 밭두둑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다와 하천의 제방이 터질 때에는 수살막이를 했다고 하여 ‘반송’이라 했다 한다.
○ 무덤실〔무단실동(武團室洞)〕 : 해변가로 산림이 우거져 야생조수가 많기 때문에 한량들이 많이 모여 들었고 마을에 한량들이 모이던 집이 있었는데 그곳을 ‘무단실동(武團室洞)’이라 하였다.
○ 정자말〔정자동(亭子洞)〕 : 장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15. 활초동(活草洞)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살촉처럼 생겼으므로 살구지 또는 활호라 하였는데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전촌, 후촌을 병합하여 활초동이라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옛부터 둔지곶면(屯知串面)의 중심지가 되었고 조선후기 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가 심할 때 신도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 후로 천주교신도가 많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근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 개묵동 : 활초동에 있는 마을이다.
○ 동이터 : 활초동에 있는 마을로
동이정이 있었다고 한다.
○ 전촌(前村) : 활초 앞에 있는 마을이다.
○ 후촌(後村) : 활초 뒤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뒷마을이라 불리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