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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7절 서신면(西新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19
제7절 서신면(西新面)
본래 남양군 신리면(新里面)과 서여제면(西如堤面)의 지역으로 7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서여제면의 7개 동리를 병합하여 서여제와 신리의 이름을 따서 서신면이라 하여 수원군에 편입되어 13개 리로 개편 관할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 광평리(廣坪里)〔너분들〕

[사진-53. 광평리 당산 전경 ]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으므로 너분들 또는 광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성바께, 고래물, 임벗을 병합하여 광평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경정촌(鯨井村)〔고래물, 고래우물〕 : 광평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모양이 바다에 사는 고래를 닮아 고래우물로 불리었으나 이 말이 점차 줄어 고래물로 되었고 그 후 구전에 의하여 고라물로 변음되었다 한다.
○ 너분들〔광평(廣坪)〕 : 넓은 들이 있으므로 너분들 또는 광평이라 하였다.
○ 성바께〔성외촌(城外村)〕 : 임벗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해운산 봉수 바깥쪽이 된다.
○ 임벗〔임포(林浦)〕 : 고래물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벗이 있다. 예부터 나주임씨가 많이 살았고 화염(천일염)을 많이 생산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임포촌(林浦村), 임벗이라 부른다.
2. 궁평리(宮坪里)〔궁들, 궁평〕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궁에서 관리하는 땅이 많았으므로 궁들 또는 궁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도적막재, 고잔, 모야니, 대수풀을 병합하여 궁평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고잔(高棧),〔꽃전, 화촌(花村)〕 : 궁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곶이(串)의 안쪽’ 즉 내륙 쪽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는 옛 궁궐을 무색케 할 정도로 꽃이 전을 이루고 있어 꽃전(花村)으로도 불렸다.
○ 대수풀 : 궁평리에 있는 마을로 대숲이 많이 있었다.
○ 도적막재 : 꽃전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밭뜸 : 궁들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 박고지(朴古地)〔뱃곶이〕 : 방죽을 막아 들판을 이룬 곳으로 옛날에는 배가 많이 드나드는 포구라는 뜻으로 ‘뱃곶이’, 또한 상주박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 그 선영이 있다는 데서 ‘박고지’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고잔’의 대칭되는 위치, 곧‘ 곶(串)+바깥(外)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바깥곶이 → 박고지 → 백곶이’로 전음된 것으로 추측된다.
○ 수문개(水門開) : 수문을 열고 닫는 마을이란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세정촌(細井村)〔잔우물〕 : 나지막한 야산이 둘러 있는 마을로서 작은 우물이 많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 오야니 : 궁평리에 있는 마을이다.
3. 매화리(梅花里)〔매골, 맷골, 매곡 매동, 매화동, 목양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서 산골짜기가 되므로 맷골, 매골, 매곡, 매동, 매화동이라 하며, 또는 나라의 양을 길렀으므로 목양동(牧羊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바닷들, 소로지를 병합하여 매화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서신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경찰지서, 학교, 우체국, 시장들이 있다.
○ 매곡(梅谷) : 매골, 매동(梅洞), 매화동(梅花洞), 맷골(牧羊洞)에서 매화리(梅花里)가 되었다. 매화나무가 번성하여 꽃이 만발하면 온 마을이 매화꽃으로 뒤덮혀 매화골로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매골(梅谷)로 부르고 있다
○ 바다들〔바닷들, 해평(海坪), 해평촌(海坪村)〕 : 매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전답(田畓)은 예부터 바다를 막아 들(坪)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바다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에는 조류에 밀려온 조약돌 등이 많아 바다돈이라고도 부른다.
○ 배터 : 매화리에 있는 마을로 전에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 소로지(小蘆池) : 바닷들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신촌(新村) : 한국전쟁 사변 직후에 월남한 피난민이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보고자 주민이 합심한다는 뜻에서 신촌(新村) 으로 부르게 되었다.
○ 헌들 : 매화리에 있는 마을이다.
4. 백미리(百味里)〔배일미, 배일, 백미〕
본래 남양군 서리면의 지역으로 높은 산 밑 골짜기가 되므로 배일미, 배일, 또는 백미라 하였다. 또는 해산물의 종류가 많고 그 맛 또한 다양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1914년 노노피, 은골, 법부리, 구리섬, 당나미를 병합하여 백머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감투섬 : 백미리에 있는 섬으로 감투처럼 생겼다.
○ 구리섬〔굴섬〕 : 굴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굴섬’으로 불려졌고 또 중국인이 이 곳에서 구리(銅)를 채취했다고 해서 ‘구리섬’(銅島)으로 불려졌다는 설도 있다. 백미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해당된다.
○ 노노피 : 당너머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당너머〔당일(堂一), 당너머촌, 당저촌(堂底村)〕 : 구리섬 동남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 배일미〔밸미〕 : 지형이 뱀의 꼬리를 사린 듯 하다는 뜻에서 ‘뱀미(蛇尾) → 밸미’로 전음된 것으로 추측된다.
○ 법부리 : 백미리에 있는 마을이다.
○ 은곡(隱谷)〔은골〕 : 백미리에 있는 마을이다.
○ 약물탕 : 백미리에 있는 샘이다.
5. 사곶리(仕串里)〔벼슬고개, 벼슬곶, 사곶〕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닭의 볏처럼 곶을 이루었으므로 벼슬고지, 벼슬곶 또는 사곶이라 하였는데, 1914년 안벼슬, 구러매, 개목촌을 병합하여 사곶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전설에 이 곳에 벼슬하는 사람이 많아서 벼슬곶이라 하여서 사곶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개목촌 : 벼슬고지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갯가의 목으로 되어 있다.
○ 개무기〔개미기〕 : 산위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꽃이 핀 나무와 같이 아름답고 무성하다 하여 개화목촌(開花木村), 또는 개무기로 불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되어 개미기가 되었다.
○ 구러매〔구월동(九月洞), 구월촌(九月村)〕 : 벼슬고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구월산 밑이 된다. 이 마을을 들어가자면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 산은 입구가 9갈래로 뻗어 있어 일명 구로산(九路山)이라 부르며 이 산을 거쳐야 들어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구로뫼, 구로매로 불리고 있다.
○ 안벼슬 : 벼슬고지의 안쪽마을이다. 예부터 벼슬하는 사람이 많아 풍요로운 생활을 하여 왔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벼슬길에 오르는 사람이 없고 벼슬을 하던 사람도 승급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삭탈관직되어 벼슬을 못한다는 데서 안벼슬, 안베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상안리(尙安里)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인데 조선시대 상림원(常林院)이 이 곳에 있어서 그 이름이 널리 불려졌다. 1914년 상림원, 돌팍제(달바위재, 월암현), 터골(기목촌), 개물, 대안동을 병합하여 상림원과 대안동의 이름을 따서 상안리라 하여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개물〔개정(開井), 蓋井〕 : 텃골 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중앙에 커다란 우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우물의 터가 매우 좋아 어느 한 사람이 이 우물을 메우고 터를 닦아 집을 건립한 후부터 우물을 메꾸어 덮었다는 개물(蓋井)로 불리우고 있다.

[사진-54. 상안 1리 마을 입구 ]
○ 달바위재〔돌팍재, 월암현(月岩峴)〕: 돌팍재 밑에 있는 마을로 상안리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달바위가 있는 고개가 있다.
○ 박세훈 묘〔박참의 묘(朴參議 墓)〕: 안골 뒤에 있는 이조참의 송촌(松村) 박세훈(朴世勳) 의 무덤이다.
○ 박세희 묘(朴世熹 墓)〔박판서 묘(朴判書 墓)〕: 안곡서원 뒤에 있는 기묘명현(己卯名賢) 도원재(道源齋) 문강공(文剛公) 박세희의 무덤이다.
○ 빗물〔우정(雨井), 비정(碑井), 우정촌(雨井村)〕: 비우물이 있는 마을이다. 상림원 남쪽에 있는 우물로 마을에서는 우물 속에서 비석이 나왔다 하여 비우물, 비정촌이라 부른다. 빗물을 막기 위하여 덮개를 하고 기념문을 새겼다.
○ 상림원, 상림안 : 상안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 때 상림원이 있었다고 한다.
○ 상안리 은행나무 : 안곡서원 서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나이가 약 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 아랫상림원 : 상림원의 아랫마을이다.
○ 안골〔안곡〕 : 상안리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이 마을 산에 와서 멈춘 형상을 하고 있어 안골(安谷)이라 부르며 또한 부유한 집들이 많아 생활에 불편이 없이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골(安谷)이라 부른다.
○ 윗상림원 : 상림원의 위쪽 마을이다.
○ 잼골〔제강곡(濟岡谷)〕 : 송산면에서 서신면 매화리로 오다가 왼쪽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서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제강곡(濟岡谷), 잼골로 부르게 되었다.
○ 지씨촌〔지촌말〕 : 상림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씨가 많이 살았다.
○ 텃골〔기곡촌(基谷村)〕 : 상림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봉화산 밑이 된다. 삼태기 같이 오목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에서 텃골 또는 기곡(基谷)으로 부르게 되었다.
7. 송교리(松橋里)〔솔다리, 송교〕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옛날 바다에 인접한 큰말(大村)까지 바닷물이 밀려오면 살곶이 마을이 고립되어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솔다리 또는 송교라 하였는데 1914년 동말, 독골, 개경촌, 딴뫼, 살꼬지를 병합하여 송교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사진-55. 송교리 살고지 해안]
○ 개경촌(開境村) : 솔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구리섬〔동도(銅島)〕 : 송교리에 있는 마을로 구리가 났다고 한다.
○ 대촌(大村) : 솔다리의 큰 마을이다. 화염(천일염) 생산의 총집합 장소로 마을의 터가 넓고 크다는 뜻에서 대촌(大村), 큰말로 부른다.
○ 독곡촌(篤谷村)〔독골, 독골촌〕 : 개경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독처럼 생겼다고 한다. 또는 마을전체가 골짜기 속에 파묻혀 아늑하고 이웃 간에 정이 두터운 마을로 독골(篤谷), 독골말로 부른다.
○ 돌말〔석촌(石村)〕 : 큰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다.
○ 딴뫼 : 개경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외딴 산이 있다.
○ 살고지 : 딴뫼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곶으로 되어 있다.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물을 맬 때 쓰는 살이 많은 데서 살고지라 부르기도 하며 한편 난을 당하였을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하여 살 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소도리 : 개경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8. 용두리(龍頭里)〔용머리, 용두〕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는데 1914년 영지촌, 옥안촌, 소경주, 전대촌을 병합하여 용두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구영종(舊永宗) : 조선시대 통제부가 있던 곳으로 영종이 강화도로 옮겨감에 따라서 이곳을 구영종이라고 불렀다.

[사진-56. 용두리 왕모대 포구(2002) ]
○ 소경주 : 용두리에 있는 마을이다.
○ 백석포(百石浦) : 이 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하루 생산량이 백가마를 웃돌 만큼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 영지(靈池)〔영지촌〕 : 전대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신령스러운 연못이 있었다.
○ 옥안이〔옥안일(玉鞍一), 옥안촌(玉鞍村)〕 : 왕오대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왕모가 왕모대에서 놀 때 옥안장을 내려놓았다 한다.
○ 왕모대(王母臺)〔왕무대(王舞臺)〕 : 큰말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서왕모가 놀았다고 한다. 가까이 바다가 있고 파도가 밀려와 경관이 좋은 곳으로 옛날 어느 임금이 이 곳에 와서 춤을 추며 놀던 곳이라 하여 왕무대(王舞臺)라 부르기도 하며 왕의 어머니가 이 곳에 머물러 있어 왕이 친히 배알하여 다니던 곳이라 하여 왕모대(王母臺)라고도 부른다.
○ 전대촌(纏帶村) : 큰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전대(錢帶)처럼 생겼다.
○ 큰말 : 용머리의 큰 마을이다.
9. 장외리(墻外里)〔담밖〕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마치 담처럼 생겼으므로 담밖 또는 장외라 하였는데 1914년 오얏골, 게골말을 병합하여 장외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계곡촌(桂谷村) : 담밖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수풀안 : 장외리에 있는 마을로 앞에 숲이 있다.
○ 오얏골 : 고려 말부터 이씨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연접한 5채의 집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오가곡천(五家谷村)으로 불리었고 또 옛 비석에는 오와곡촌(五瓦谷村)이라 되어있어 이 곳에 5채의 기와집이 마을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곳은 배나무(오얏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담밖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얏나무가 있었다고도 한다.
○ 지굿말〔지굴말, 지굴촌(知屈村)〕 : 수많은 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서 개골성의 개구리 잡으러 기어가다 우뚝 선 형상으로 구부러져 있다 해서 지굴촌(知屈村) 또는 지긋말이라 한다.
10. 전곡리(前谷里)〔앞실, 전곡〕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구봉산 앞 골짜기가 되므로 앞실 또는 전곡이라 하였고 또한 벼슬아치가 많아 부자집이 많고 세도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앞실(前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1914년 구릉내, 무두리, 은장동, 노가리, 독잣골을 병합하여 앞실의 전(前)자와 계곡이 많다는 뜻에서 곡(谷)자를 합하여 전곡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사진-57. 구릉내 마을 전경 ]
○ 구릉내〔운천동(雲川洞)〕 : 앞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인조반정 때 홍진래가 거사에 성공하여 주부공의 벼슬을 하사받아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맑고 깨끗하여 은하수 같고 자욱한 구름이 서린 듯 하다 하여 구릉내 또는 운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노가리〔노화동(蘆花洞)〕 : 앞실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봉산(九峯山)과 봉화산(峯火山)에서 흐르는 물이 서해의 조류와 합류하여 벌판을 이루고 이 벌판에는 갈대꽃이 무성하여 그 꽃이 피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고 하여 노가리(蘆佳里) 또는 노화리(蘆花里)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 당곶이〔당곶(唐串)〕 : 당곶이는 삼국시대 때부터 당나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포구를 만들고 무역선이 드나들던 곶이(串)이라는 데서 ‘당곶이 → 당곶’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독자동(獨自洞)〔독잣골〕 : 앞실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양홍씨의 집성촌으로 족자동(族慈洞)으로 불리다가 마을형세가 마치 까치가 혼자 날갯짓을 하며 날기 시작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독작골’(獨鵲谷)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무두리〔뭇두리〕 : 구름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갯물이 드나들었는데 이곳까지 밀려들었던 잡어들을 하루에 많은 두름 또는 믓으로 잡는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앞실〔전실(前室)〕 : 구봉산 앞 골짜기가 되므로 앞실 또는 전곡(前谷)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한양서 낙향한 세도가문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타 지역보다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앞서가는 마을이라는 뜻의 앞실(前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은장동(隱藏洞)〔은쟁이〕 : 노가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봉화산(峯火山)이 둘러싸서 숨은 것 같은 마을이란 데서 불려진 이름이며 은장촌 →은쟁이로 전응된 것이다.
○ 왜실(矮室) : 외진 골짜기 속에 위치한 마을로 키가 작고 생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고 살았던 마을로 왜소한 마을이라는 것을 표현하여 왜실(矮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1. 제부리(濟扶里)〔젖부리, 젖비, 제부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젖꼭지처럼 생겼으므로 젖부리, 젖비, 또는 제부동이라 하였는데, 또한 조선 중엽 이후 이 곳과 송교리를 연결한 갯벌고랑을 어린아이를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뜻의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에서 제부리로 개칭했다는 설도 있다.
○ 젖부리 : 제부리의 전음현상으로 보인다. 1914년 제부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12. 홍법리(弘法里)〔홍법굴, 홍법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1611년(광해군 3)에 건립된 홍씨 문중의 원찰인 홍법사가 있으므로 홍법굴(골) 또는 홍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삼밭골, 모래지를 병합하여 홍법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각골〔각곡(角谷)〕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양쪽모서리가 뾰족한 바위로 되어 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 도리도(桃李島) : 큰말 남쪽에 있는 섬이다.
○ 삼밭골〔마전곡(麻田谷)〕 : 큰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옷을 만들어 입었던 마(麻)가 많이 자생되었고, 이를 재배하여 생업을 이어가던 가구가 많아 마전(麻田)으로 불리어 오다 이를 삼밭골로 부르게 되었다.
○ 모래지 : 고운 모래가 많은 마을이라는 데서 모래지→모라지로 전음되었다.
○ 큰말 : 홍법굴의 큰 마을이다.
본래 남양군 신리면(新里面)과 서여제면(西如堤面)의 지역으로 7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서여제면의 7개 동리를 병합하여 서여제와 신리의 이름을 따서 서신면이라 하여 수원군에 편입되어 13개 리로 개편 관할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 광평리(廣坪里)〔너분들〕

[사진-53. 광평리 당산 전경 ]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으므로 너분들 또는 광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성바께, 고래물, 임벗을 병합하여 광평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경정촌(鯨井村)〔고래물, 고래우물〕 : 광평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모양이 바다에 사는 고래를 닮아 고래우물로 불리었으나 이 말이 점차 줄어 고래물로 되었고 그 후 구전에 의하여 고라물로 변음되었다 한다.
○ 너분들〔광평(廣坪)〕 : 넓은 들이 있으므로 너분들 또는 광평이라 하였다.
○ 성바께〔성외촌(城外村)〕 : 임벗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해운산 봉수 바깥쪽이 된다.
○ 임벗〔임포(林浦)〕 : 고래물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벗이 있다. 예부터 나주임씨가 많이 살았고 화염(천일염)을 많이 생산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임포촌(林浦村), 임벗이라 부른다.
2. 궁평리(宮坪里)〔궁들, 궁평〕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궁에서 관리하는 땅이 많았으므로 궁들 또는 궁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도적막재, 고잔, 모야니, 대수풀을 병합하여 궁평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고잔(高棧),〔꽃전, 화촌(花村)〕 : 궁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곶이(串)의 안쪽’ 즉 내륙 쪽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는 옛 궁궐을 무색케 할 정도로 꽃이 전을 이루고 있어 꽃전(花村)으로도 불렸다.
○ 대수풀 : 궁평리에 있는 마을로 대숲이 많이 있었다.
○ 도적막재 : 꽃전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밭뜸 : 궁들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 박고지(朴古地)〔뱃곶이〕 : 방죽을 막아 들판을 이룬 곳으로 옛날에는 배가 많이 드나드는 포구라는 뜻으로 ‘뱃곶이’, 또한 상주박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 그 선영이 있다는 데서 ‘박고지’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고잔’의 대칭되는 위치, 곧‘ 곶(串)+바깥(外)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바깥곶이 → 박고지 → 백곶이’로 전음된 것으로 추측된다.
○ 수문개(水門開) : 수문을 열고 닫는 마을이란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세정촌(細井村)〔잔우물〕 : 나지막한 야산이 둘러 있는 마을로서 작은 우물이 많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 오야니 : 궁평리에 있는 마을이다.
3. 매화리(梅花里)〔매골, 맷골, 매곡 매동, 매화동, 목양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서 산골짜기가 되므로 맷골, 매골, 매곡, 매동, 매화동이라 하며, 또는 나라의 양을 길렀으므로 목양동(牧羊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바닷들, 소로지를 병합하여 매화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서신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경찰지서, 학교, 우체국, 시장들이 있다.
○ 매곡(梅谷) : 매골, 매동(梅洞), 매화동(梅花洞), 맷골(牧羊洞)에서 매화리(梅花里)가 되었다. 매화나무가 번성하여 꽃이 만발하면 온 마을이 매화꽃으로 뒤덮혀 매화골로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매골(梅谷)로 부르고 있다
○ 바다들〔바닷들, 해평(海坪), 해평촌(海坪村)〕 : 매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전답(田畓)은 예부터 바다를 막아 들(坪)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바다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에는 조류에 밀려온 조약돌 등이 많아 바다돈이라고도 부른다.
○ 배터 : 매화리에 있는 마을로 전에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 소로지(小蘆池) : 바닷들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신촌(新村) : 한국전쟁 사변 직후에 월남한 피난민이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보고자 주민이 합심한다는 뜻에서 신촌(新村) 으로 부르게 되었다.
○ 헌들 : 매화리에 있는 마을이다.
4. 백미리(百味里)〔배일미, 배일, 백미〕
본래 남양군 서리면의 지역으로 높은 산 밑 골짜기가 되므로 배일미, 배일, 또는 백미라 하였다. 또는 해산물의 종류가 많고 그 맛 또한 다양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1914년 노노피, 은골, 법부리, 구리섬, 당나미를 병합하여 백머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감투섬 : 백미리에 있는 섬으로 감투처럼 생겼다.
○ 구리섬〔굴섬〕 : 굴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굴섬’으로 불려졌고 또 중국인이 이 곳에서 구리(銅)를 채취했다고 해서 ‘구리섬’(銅島)으로 불려졌다는 설도 있다. 백미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해당된다.
○ 노노피 : 당너머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당너머〔당일(堂一), 당너머촌, 당저촌(堂底村)〕 : 구리섬 동남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 배일미〔밸미〕 : 지형이 뱀의 꼬리를 사린 듯 하다는 뜻에서 ‘뱀미(蛇尾) → 밸미’로 전음된 것으로 추측된다.
○ 법부리 : 백미리에 있는 마을이다.
○ 은곡(隱谷)〔은골〕 : 백미리에 있는 마을이다.
○ 약물탕 : 백미리에 있는 샘이다.
5. 사곶리(仕串里)〔벼슬고개, 벼슬곶, 사곶〕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닭의 볏처럼 곶을 이루었으므로 벼슬고지, 벼슬곶 또는 사곶이라 하였는데, 1914년 안벼슬, 구러매, 개목촌을 병합하여 사곶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전설에 이 곳에 벼슬하는 사람이 많아서 벼슬곶이라 하여서 사곶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개목촌 : 벼슬고지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갯가의 목으로 되어 있다.
○ 개무기〔개미기〕 : 산위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꽃이 핀 나무와 같이 아름답고 무성하다 하여 개화목촌(開花木村), 또는 개무기로 불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되어 개미기가 되었다.
○ 구러매〔구월동(九月洞), 구월촌(九月村)〕 : 벼슬고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구월산 밑이 된다. 이 마을을 들어가자면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 산은 입구가 9갈래로 뻗어 있어 일명 구로산(九路山)이라 부르며 이 산을 거쳐야 들어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구로뫼, 구로매로 불리고 있다.
○ 안벼슬 : 벼슬고지의 안쪽마을이다. 예부터 벼슬하는 사람이 많아 풍요로운 생활을 하여 왔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벼슬길에 오르는 사람이 없고 벼슬을 하던 사람도 승급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삭탈관직되어 벼슬을 못한다는 데서 안벼슬, 안베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상안리(尙安里)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인데 조선시대 상림원(常林院)이 이 곳에 있어서 그 이름이 널리 불려졌다. 1914년 상림원, 돌팍제(달바위재, 월암현), 터골(기목촌), 개물, 대안동을 병합하여 상림원과 대안동의 이름을 따서 상안리라 하여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개물〔개정(開井), 蓋井〕 : 텃골 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중앙에 커다란 우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우물의 터가 매우 좋아 어느 한 사람이 이 우물을 메우고 터를 닦아 집을 건립한 후부터 우물을 메꾸어 덮었다는 개물(蓋井)로 불리우고 있다.

[사진-54. 상안 1리 마을 입구 ]
○ 달바위재〔돌팍재, 월암현(月岩峴)〕: 돌팍재 밑에 있는 마을로 상안리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달바위가 있는 고개가 있다.
○ 박세훈 묘〔박참의 묘(朴參議 墓)〕: 안골 뒤에 있는 이조참의 송촌(松村) 박세훈(朴世勳) 의 무덤이다.
○ 박세희 묘(朴世熹 墓)〔박판서 묘(朴判書 墓)〕: 안곡서원 뒤에 있는 기묘명현(己卯名賢) 도원재(道源齋) 문강공(文剛公) 박세희의 무덤이다.
○ 빗물〔우정(雨井), 비정(碑井), 우정촌(雨井村)〕: 비우물이 있는 마을이다. 상림원 남쪽에 있는 우물로 마을에서는 우물 속에서 비석이 나왔다 하여 비우물, 비정촌이라 부른다. 빗물을 막기 위하여 덮개를 하고 기념문을 새겼다.
○ 상림원, 상림안 : 상안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 때 상림원이 있었다고 한다.
○ 상안리 은행나무 : 안곡서원 서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나이가 약 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 아랫상림원 : 상림원의 아랫마을이다.
○ 안골〔안곡〕 : 상안리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이 마을 산에 와서 멈춘 형상을 하고 있어 안골(安谷)이라 부르며 또한 부유한 집들이 많아 생활에 불편이 없이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골(安谷)이라 부른다.
○ 윗상림원 : 상림원의 위쪽 마을이다.
○ 잼골〔제강곡(濟岡谷)〕 : 송산면에서 서신면 매화리로 오다가 왼쪽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서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제강곡(濟岡谷), 잼골로 부르게 되었다.
○ 지씨촌〔지촌말〕 : 상림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씨가 많이 살았다.
○ 텃골〔기곡촌(基谷村)〕 : 상림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봉화산 밑이 된다. 삼태기 같이 오목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에서 텃골 또는 기곡(基谷)으로 부르게 되었다.
7. 송교리(松橋里)〔솔다리, 송교〕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옛날 바다에 인접한 큰말(大村)까지 바닷물이 밀려오면 살곶이 마을이 고립되어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솔다리 또는 송교라 하였는데 1914년 동말, 독골, 개경촌, 딴뫼, 살꼬지를 병합하여 송교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사진-55. 송교리 살고지 해안]
○ 개경촌(開境村) : 솔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구리섬〔동도(銅島)〕 : 송교리에 있는 마을로 구리가 났다고 한다.
○ 대촌(大村) : 솔다리의 큰 마을이다. 화염(천일염) 생산의 총집합 장소로 마을의 터가 넓고 크다는 뜻에서 대촌(大村), 큰말로 부른다.
○ 독곡촌(篤谷村)〔독골, 독골촌〕 : 개경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독처럼 생겼다고 한다. 또는 마을전체가 골짜기 속에 파묻혀 아늑하고 이웃 간에 정이 두터운 마을로 독골(篤谷), 독골말로 부른다.
○ 돌말〔석촌(石村)〕 : 큰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다.
○ 딴뫼 : 개경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외딴 산이 있다.
○ 살고지 : 딴뫼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곶으로 되어 있다.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물을 맬 때 쓰는 살이 많은 데서 살고지라 부르기도 하며 한편 난을 당하였을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하여 살 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소도리 : 개경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8. 용두리(龍頭里)〔용머리, 용두〕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는데 1914년 영지촌, 옥안촌, 소경주, 전대촌을 병합하여 용두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구영종(舊永宗) : 조선시대 통제부가 있던 곳으로 영종이 강화도로 옮겨감에 따라서 이곳을 구영종이라고 불렀다.

[사진-56. 용두리 왕모대 포구(2002) ]
○ 소경주 : 용두리에 있는 마을이다.
○ 백석포(百石浦) : 이 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하루 생산량이 백가마를 웃돌 만큼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 영지(靈池)〔영지촌〕 : 전대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신령스러운 연못이 있었다.
○ 옥안이〔옥안일(玉鞍一), 옥안촌(玉鞍村)〕 : 왕오대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왕모가 왕모대에서 놀 때 옥안장을 내려놓았다 한다.
○ 왕모대(王母臺)〔왕무대(王舞臺)〕 : 큰말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서왕모가 놀았다고 한다. 가까이 바다가 있고 파도가 밀려와 경관이 좋은 곳으로 옛날 어느 임금이 이 곳에 와서 춤을 추며 놀던 곳이라 하여 왕무대(王舞臺)라 부르기도 하며 왕의 어머니가 이 곳에 머물러 있어 왕이 친히 배알하여 다니던 곳이라 하여 왕모대(王母臺)라고도 부른다.
○ 전대촌(纏帶村) : 큰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전대(錢帶)처럼 생겼다.
○ 큰말 : 용머리의 큰 마을이다.
9. 장외리(墻外里)〔담밖〕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마치 담처럼 생겼으므로 담밖 또는 장외라 하였는데 1914년 오얏골, 게골말을 병합하여 장외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계곡촌(桂谷村) : 담밖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수풀안 : 장외리에 있는 마을로 앞에 숲이 있다.
○ 오얏골 : 고려 말부터 이씨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연접한 5채의 집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오가곡천(五家谷村)으로 불리었고 또 옛 비석에는 오와곡촌(五瓦谷村)이라 되어있어 이 곳에 5채의 기와집이 마을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곳은 배나무(오얏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담밖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얏나무가 있었다고도 한다.
○ 지굿말〔지굴말, 지굴촌(知屈村)〕 : 수많은 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서 개골성의 개구리 잡으러 기어가다 우뚝 선 형상으로 구부러져 있다 해서 지굴촌(知屈村) 또는 지긋말이라 한다.
10. 전곡리(前谷里)〔앞실, 전곡〕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 구봉산 앞 골짜기가 되므로 앞실 또는 전곡이라 하였고 또한 벼슬아치가 많아 부자집이 많고 세도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앞실(前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1914년 구릉내, 무두리, 은장동, 노가리, 독잣골을 병합하여 앞실의 전(前)자와 계곡이 많다는 뜻에서 곡(谷)자를 합하여 전곡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사진-57. 구릉내 마을 전경 ]
○ 구릉내〔운천동(雲川洞)〕 : 앞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인조반정 때 홍진래가 거사에 성공하여 주부공의 벼슬을 하사받아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맑고 깨끗하여 은하수 같고 자욱한 구름이 서린 듯 하다 하여 구릉내 또는 운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노가리〔노화동(蘆花洞)〕 : 앞실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봉산(九峯山)과 봉화산(峯火山)에서 흐르는 물이 서해의 조류와 합류하여 벌판을 이루고 이 벌판에는 갈대꽃이 무성하여 그 꽃이 피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고 하여 노가리(蘆佳里) 또는 노화리(蘆花里)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 당곶이〔당곶(唐串)〕 : 당곶이는 삼국시대 때부터 당나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포구를 만들고 무역선이 드나들던 곶이(串)이라는 데서 ‘당곶이 → 당곶’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독자동(獨自洞)〔독잣골〕 : 앞실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양홍씨의 집성촌으로 족자동(族慈洞)으로 불리다가 마을형세가 마치 까치가 혼자 날갯짓을 하며 날기 시작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독작골’(獨鵲谷)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무두리〔뭇두리〕 : 구름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갯물이 드나들었는데 이곳까지 밀려들었던 잡어들을 하루에 많은 두름 또는 믓으로 잡는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앞실〔전실(前室)〕 : 구봉산 앞 골짜기가 되므로 앞실 또는 전곡(前谷)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한양서 낙향한 세도가문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타 지역보다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앞서가는 마을이라는 뜻의 앞실(前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은장동(隱藏洞)〔은쟁이〕 : 노가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봉화산(峯火山)이 둘러싸서 숨은 것 같은 마을이란 데서 불려진 이름이며 은장촌 →은쟁이로 전응된 것이다.
○ 왜실(矮室) : 외진 골짜기 속에 위치한 마을로 키가 작고 생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고 살았던 마을로 왜소한 마을이라는 것을 표현하여 왜실(矮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1. 제부리(濟扶里)〔젖부리, 젖비, 제부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젖꼭지처럼 생겼으므로 젖부리, 젖비, 또는 제부동이라 하였는데, 또한 조선 중엽 이후 이 곳과 송교리를 연결한 갯벌고랑을 어린아이를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뜻의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에서 제부리로 개칭했다는 설도 있다.
○ 젖부리 : 제부리의 전음현상으로 보인다. 1914년 제부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12. 홍법리(弘法里)〔홍법굴, 홍법동〕
본래 남양군 신리면의 지역으로 1611년(광해군 3)에 건립된 홍씨 문중의 원찰인 홍법사가 있으므로 홍법굴(골) 또는 홍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삼밭골, 모래지를 병합하여 홍법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 각골〔각곡(角谷)〕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양쪽모서리가 뾰족한 바위로 되어 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 도리도(桃李島) : 큰말 남쪽에 있는 섬이다.
○ 삼밭골〔마전곡(麻田谷)〕 : 큰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옷을 만들어 입었던 마(麻)가 많이 자생되었고, 이를 재배하여 생업을 이어가던 가구가 많아 마전(麻田)으로 불리어 오다 이를 삼밭골로 부르게 되었다.
○ 모래지 : 고운 모래가 많은 마을이라는 데서 모래지→모라지로 전음되었다.
○ 큰말 : 홍법굴의 큰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