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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9절 양감면(楊甘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177
제9절 양감면(楊甘面)

본래 수원군의 지역으로서 양간면(楊澗面)이라 하여 12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상홀면(床笏面)의 10개 동리와 감미면(甘味面)의 7개 동리, 진위군 율북면의 진목리(眞木里)를 병합하며 양간과 감미의 이름을 따서 양감면이라 하며 8개리로 개편·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평택시 서탄면, 남쪽은 평택시 청북면, 서쪽과 북쪽은 향남면에 닿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군·현 아래에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등의 특수한 행정조직을 두었는데, 오늘날 양감면 사창 1리인 사창 마을은 고려 때 쟁홀부곡(爭忽部曲)이었으며, 용소2리의 양간 또는 소동 마을에는 양간처(楊干處)라는 특수한 하부 행정조직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군·면 통·폐합으로 양간면, 상홀면, 감미면을 통·폐합하고, 여기에 토진면(土津面)의 일부를 편입하여 양감면으로 개칭하고 수원군에 속하게 하였다. 1949년 8월 14일 화성군 양감면이 되었고, 1987년 행정 편의상 양감면 고령리가 평택군에 이관되었으며, 1992년 10월 1일 분동하여 현재의 양감면은 7개 법정리를 25개의 행정리로 나누었으며, 54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대양리(大陽里)



[사진-65. 대양 1리 ‘댕이’ 지명을 이용한 사례 ]

본래 양성군 감미면 대양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행정제도를 23부제로 대개편할 때 수원군에 편입되어 감미면이 되었다. 다음 해(1896년) 구제로 복구하면서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에도 감미면 대양은 그대로 수원군에 속하였다. 이 때 감미면 10개리 중 사양(沙陽)·대양·송산(松山)이 지금의 대양리에 속하고 있다. 현재 4개 행정리를 두고 있다.
○ 대양 1리 : 댕이와 텃굴의 두 자연촌락으로 되어 있다. 댕이가 동리의 중심이며 텃굴은 분탑굴, 불당골, 음짓말이라고도 하며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다. 댕이는 조선조 중엽 함평 이씨가 처음 이 곳에 정착할 때 마을 뒤편에 숲과 소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가운데를 내(官里川)가 흐르며, 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며, 장차 마을이 떠오르는 해와 같이 발전할 것을 기원하는 뜻에서 대양이라 하였으니 태양숭배의 ‘얼’ 지명이다. 텃굴이란 신라,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므로 각지에 절이 많이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병란 등으로 파괴·소실된 절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절골(寺洞, 寺谷, 寺里), 탑골(塔洞, 塔谷, 塔里) 등의 지명이 수백을 헤아릴 정도로 많이 있다. 대양리 골짜기에도 탑이 있었으므로 ‘탑골’이란 지명이 생겼고, 예전의 절터라고 하여 ‘엇절’,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불당골’, ‘불탑굴’이라 한 것이 ‘텃굴’로 변하였으니 절터가 있었던 마을이란 뜻이다. 화리현리 양석골에서 양감면으로 넘어오면 오른쪽으로 첫 동리이며 안쪽 골짜기까지 마을이 산재해 있다.



[사진-66. 대양 2리 솔미마을 입구 ]

○ 대양 2리〔솔미, 송산(松山), 송양동(松陽洞)〕 : 본래 양성군 감미면 송산이었으나 1895년(고종 32)에 수원군에 편입되어 감미면 송산이 되었다가 1914년 양감면 대양리에 흡수되었다. 관리천 동쪽으로 숲이 무성한 초록산맥을 등에 업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여 송산, 송양동으로 쓰고 솔미라 부른 산업지명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에서 가장 흔하며 연중 푸르름으로써 동양 사람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이리하여 우리생활에 필요한 건축자재, 가구로부터 신탄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소나무가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 대양 3리〔개월〕 : 『증보문헌비고』에 양간면 15개리 중 ‘개월리’(開月里)가 나온다. 1914년 양감면 대양 1리에 흡수되었다. 샘이 서쪽에 있다. 한정된 농토에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불모지를 새로이 개간하며 농토를 넓혔다. 이와 같이 새로 개척된 곳이나 새로 생긴 마을 등에는 「개」자 지명이 많으니 개월도 그 예이다.
○ 대양 4리(생이 또는(沙陽洞)) : 『화성지』의 양간면 사양리(思養里)였으나 뒤에 양성군(陽城郡)으로 넘어가 양성군 감미면 사양(沙陽)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수원군에 다시 편입되었고, 1914년에 양감면 대양리에 흡수되었다. 댕이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동리 앞 관리천가에 고운 모래가 많이 나서 사양동, 사양이라 한 것이 음편상 생이로 변한 자연지명이다. 윗동리를 ‘윗생이’, 아랫동이를 ‘아랫생이’라고 부른다.​

2. 사창리(社倉里)〔사창동, 쟁홀부곡, 쟁홀, 생골〕



[사진-67. 사창 3리 동짓골 마을전경 ]

본래 수원군 상홀면의 지역으로 고려 때 쟁홀부곡이 있었으므로 쟁홀부곡, 쟁홀, 생골이라 하였으며 또 조선 때 사창이 있었으므로 사창, 사창동이라 하였다. 사창리란 지명이 처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1792년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부읍지』로 창고조(倉庫條)에 ‘사창재부남쟁홀면(社倉在府南爭忽面)’이라 하였다. 그러나 방리조(坊里條)에는 쟁홀면이 없고 상홀면으로 나오니 쟁홀이 상홀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화성지』에는 40개 방리 중 상홀면과 창동(倉洞)으로 1896년 13도제 개편시에는 상홀면 사창으로 되었다가 1914년 오가리, 동짓골, 욧골을 병합하여 사창리라 해서 양감면에 편입되었다. 창(倉) 지명 중에는 부(府)·현(縣)·군(郡)·원(院)·사(寺)등의 행정단위의 이름을 딴 창이 많았으니 사(社)는 군(郡)의 소구분으로 지금의 면(面)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사(社)의 이름을 붙인 사창(社倉)이 전국에 많이 남아있다. 즉 사창은 사에 있었던 창을 말한다. 현재 4개 행정리를 두고 있다.

○ 사창 1리(사창) : 고려시대의 쟁홀부곡으로 조선조에는 환곡을 저장해두던 고을의 곶집으로 사창이 있었으므로 생긴 창 지명이다. 따라서 쟁홀, 생골〔상홀(床笏)〕이라고도 한다. 사창초등학교가 있다.
○ 사창 2리 : 욧골과 안욧골의 두 마을로 되어 있다. 동짓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욧골은 향남면 요리의 욧골과 양강면 사창리의 욧골로 나뉘었으니 면계가 두 마을 사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60년 봄에 양감쪽 용골에 2일, 7일에 장이 서게 되면서 새로운 취락이 형성되어 제법 번창하였으나, 도로가 개선되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불과 5 ~ 6년 후에 장터는 없어졌다. 안욧골은 욧골에서 서쪽으로 구릉을 넘어간 안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안욧골이라 부른다. 본래 이 곳이 욧골이었으나 지금은 장터로 마을이 번창한 욧골에 비해 마을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요동(蓼洞)이라 쓰고 있으니, ‘예뀌’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자연지명으로 본다
○ 사창 3리(동짓골) : 『화성지』에 상홀면 6개동 중 동지동(東枝洞)으로 처음 보이며 『수원군읍지』에도 같은 내용으로 이어졌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양감면 사창리에 통합되었다. 사창 1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초록산맥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내려간 끝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지동(東枝洞)이라 한 것이 동짓골로 변하였다. 세칭 사창리성이라고 불리는 옛 토석혼축성터가 남아 있다.
○ 사창 4리(신흥동) : 1896년(고종 33) 13도제를 실시할 때 상홀면 13개리 중 오가리(五加里)로 기록된 마을이다. 사창 1리 남쪽에 있다. 지형이 오가리처럼 생겨서 오가리라 하였으나 ‘오가리가 들다’와 같은 좋지 않은 지명이라 하여 새로 활기차게 이어남을 바라는 뜻에서 신흥동(新興洞)이라 고쳤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옛날 이 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이 있어 ‘옥안이’라 한 것이 오가리가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이 마을에 처음 다섯 가구가 살기 시작하여 오가리라 하였다고도 한다.​

3. 송산리(松山里)

『화성지』에 상홀면 6개 동리 가운에 송산리로 나오며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도 상홀면 13개리 중 송산으로 있었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지금의 양감면 송산리가 되었다. 현재 행정리가 넷으로 나뉘어져 있다.
○ 송산 1리〔후곡동(後谷洞), 뒷골〕 :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 처음으로 상홀면 13개리 중 후곡(後谷)으로 나오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지금의 양감면 송산리에 통합되었다. 송산리의 중심인 송산동 북서쪽 뒷골에 있으므로 ‘후곡동(後谷洞)`’ 뒷골말`이라고 부른다.
○ 송산 2리〔솔미, 선이〕 :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사랑받는 송(松)·죽(竹)·매(梅)는 우리나라 지명에 많이 쓰여 지고 있다. 송죽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동양 사람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그리하여 이곳 산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연중 푸르름을 자랑하므로 송산동, 솔말, 솔미`라고 부른 것이 선이`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우리말에서 솔`은 가늘다, 작다, 좁다`의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작은(좁은)산이 올망졸망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사실 송산동 주변에는 표고 50m 안쪽의 구릉이 많다. 작은말은 으뜸 되는(큰) 마을인 송산동에서 동쪽으로 약300m 떨어진 곳에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어 ‘작은말’‘솔말’` 또는 ‘아랫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 송산 3리〔불천(佛川), 부처내〕 : 양감면 동북쪽 끝인 황구지천가에 위치하고 있다. 하천과 관계되는 곡류(曲流) 지명으로 황구지천의 흐르는 모습이 불(佛)자와 같이 구부러져 흐름으로 불천(佛川)·부처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전설, 설화상의 지명유래로는 옛날에 마을 앞개울에서 불상이 여러 점 나왔으므로 불천동(佛川洞) 또는 부처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또한 이 곳에는 욕심 많고 심술궂은 부자 조마전이라는 사람이 착한 며느리의 말을 안 듣고벼락을 맞아 죽었고 그 며느리는 죽어서 부처로 화신했다고 하는 권선징악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리하여 부처가 있는 내라 해서 부처내라고 한다.
○ 송산 4리〔월촌(越村), 건넛말〕 :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 상홀면 13개리 중 월촌(越村)으로 나오며 1914년 지금의 양감면 송산리에 통·폐합되었다. 지명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붙여지는 것이므로 그 땅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건넛말은 건너에 있는 마을을 이르는데 건너다(越)에 말(村)을 합쳐 월촌(越村) 또는 건넛말이라 한다. 솔미 북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4. 신왕리(新旺里)〔샘골, 샘이, 신왕동〕



[사진-68. 양감면 신왕 2리 독줄마을 전경 ]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샘골, 생이 또는 신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동신왕리, 서신왕리, 독주동, 창촌, 양아틀을 병합하여 신왕리라 하였다. 양감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경찰지서, 학교, 우체국이 있다. 『화성지』에 양간면(楊澗面) 신왕동(新往洞)이 나오며 1896년(고종 33) 13도제를 실시할 때에는 양간면 신왕동을 동신왕리·서신왕리의 두 개 리로 분동하면서 왕(往)자를 왕(旺)으로 바꾼 리명이 되었다.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특징인 개척(開拓)에 관계되는 지명으로 전국에 신(新)자가 붙은 땅이름이 많다. 대양리와 신왕리의 중앙을 남으로 흐르는 관리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하천가에 제방을 축조하고 새로운 농경지로 개간한 땅에 새로이 일어난 마을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다른 일설은 자연이나 풍토에 관계되는 지명으로 좋은 물이 나는 우물이나 샘이 있는 곳으로 새로 가서(往 : 갈왕) 살자는 뜻으로 신왕(新往)이었다가 성할 왕(旺)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1916년 요당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신왕리에 옮기고 현재 4개 행정리를 두고 있다. ○ 신왕 1리〔서신왕, 아랫생이〕 : 생이의 서쪽 마을이므로 서신왕 또는 윗생이의 아래이므로 아랫생이라고도 한다.
○ 신왕 2리 : 독주울 또는 독줄이라 한다. 창말 동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조선시대 중엽에 한 선비가 작은집을 짓고 홀로 살았으므로 독주동(獨住洞) 또는 독조동(獨調洞)이라 한 것이 독주동(篤柱洞, 독주울)으로 변했다고 한다. 『화성지』에는 독조리(獨調里)로 1896년(고종 33) 13도제를 실시할 때는 독주동(篤柱洞)으로 되어 있다.
○ 신왕 3리〔동신왕, 조리울, 느리울〕 : 생이 동쪽 마을이므로 ‘동신왕’ 또는 양감초등학교·양감중학교가 있었으므로 ‘학교동네’라고도 한다. 한편 마을 뒤의 초록산에는 조리(갈매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동리 울타리에 이용되었으므로 ‘조리울’이라고도 하였고 ‘느리울’ 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수목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한다.
○ 신왕 4리〔창말, 건넛말, 작은독줄〕 : 농민으로부터 징수한 곡물을 거두어들이고 이를 수송, 보관하기 위해 창(倉)이 필요하였다. 이 창이 있었던 곳에 붙여진 창 지명이 ‘창말’(倉村)이다. 한편 으뜸 되는 마을인 독주울 건너에 있으므로 ‘건넛말’ 또는 ‘작은독줄’이라고도 한다. 창말은 1992년 10월 1일 분동승인으로 신왕 4리가 되었다.​

5. 요당리(蓼塘里)



[사진-69. 양감면 요당 2리 장승터]

‘요댕이’라고도 하며 『화성지』에 처음으로 양간면 요당리가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은 구한말까지도 바닷가 마을로써 여귀(蓼)가 많은 연못(塘)이 곳곳에 많이 있었으므로 생긴 자연지명이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만촌, 소만촌, 동내를 병합하여 요당리라 해서 양감면에 편입되었다. ○ 요당 1리 : 요댕이라고도 한다.

○ 요당 2리 : ‘장승백이’, ‘느지리’, ‘돌내’라는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다. 장승백이는 대만촌(大晩村)이라고도 하며 구한말에 바닷물이 이 마을 앞까지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고 하여 ‘늦인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화성지』에 만촌(晩村)으로 표기하였으며 그 후 마을이 번창하자 큰 마을은 ‘대만촌’(大晩村), 작은 마을은 ‘소만촌’이라 적었다. 요댕이 서쪽의 큰 마을이다. 또한 ‘장승백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우고 출어시에 무사한 뱃길과 풍어를 바라며 마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던 토속신앙에 관계되는 지명이다. 느지지(小晩村) 또는 ‘만어언리’(晩於堰里)라고도 하며 장승백이 북쪽의 작은 마을이다. 조수가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고 해서 ‘늦어지’라고 한 것이 음편상 ‘느지지’ 가 된 것이다. 돌내(石川)는 느지지 서쪽에 있는 마을로 향남면 구문천리의 돌내 옆이 됨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화성지』에 양간면 11동리 중 석천(石川), 만어언리(晩於堰里), 만촌(晩村), 요당리의 4개리가 지금의 요당리임을 볼 때, 이 곳이 옛날에는 살기 좋은 어촌으로써 많은 어민이 모여 살았음을 지명유래를 통하여 알 수 있다.​

6. 용소리(龍沼里)

『세종실록』에 양간처(楊干處)로 나오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양간처로 되어있으나 『여지도서』에는 양간면(揚干面)으로 바뀌었다. 그 후 『화성지』에서 양간면(楊澗面)이 되어 한말에 이르고 있다. 용소리는 『화성지』의 양간면 용소리, 1896년(고종 33) 13도제 개편 시 양간면 용치동, 1914년 양감면 용소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4개 행정리로 나뉘어져 있다.
○ 용소 1리(용소말) : 옛날에 마을 뒷산에 있는 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그 못을 용소라 한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전설·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용소리에서 제일 큰 동리로 북쪽에 위치한다.
○ 용소 2리 : 양간, 큰말, 안산말의 세 마을로 되어 있다. 양간은 용소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양간소(楊干所), 양간처(楊干處)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양간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생긴 행정지명이다. 소, 처는 향(鄕), 부곡(部曲)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구역이었다. 대체로 향·부곡이 다소 상위 행정구역인데 비하여 소·처는 그보다 하위의 행정구역이었다. 양간소가 있었던 마을이므로 소동(所洞)이라고도 불렀다. 큰말은 용소말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송소동(松沼洞)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 33)에 양간면 15개리 중 대촌(大村)`으로 처음 나오나 1914년 양감면 용소리에 통·폐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산(案山)말은 용소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큰말의 서남쪽이다.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양간면 15개리 중 안산동`으로 처음 보이나 1914년에 양감면 용소리에 통·폐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솔안 앞에 있는 안산 밑에 이룩된 마을이므로 안산동, 안산말이라 하였다.
○ 용소 3리 : 솔안과 뒷골말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솔안(松內洞, 松院洞)은 1896년(고종 33)에 처음으로 양간면(楊澗面)15개리 중 ‘송내동`(松內洞)으로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나 1914년에 양감면 용소리에 통·폐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소말 남서쪽의 마을로 마을 앞에 소(沼:늪)가 있었다 하여 ‘소안’이라 지었으나 음편상 ‘솔안’이 되고, 한자로 송내(松內) 또는 송원(松院)이라 쓰게 되었다. 뒷골말(後谷)은 1896년(고종 33)에 양간면 15개리 중 ‘후곡’(後谷)으로 처음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양감면 용소리에 통·폐합되었다. 용소말 남쪽에 있다. 이 때 상홀면에서도 후곡(後谷)이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큰말 북쪽 뒷골에 있으므로 ‘후곡동’, ‘뒷골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용소 4리(큰길목) : 정문 2리인 작은길목과 한 마을이나 리계가 두 마을 사이의 도로로 되면서 큰길목은 용소 4리가 되었다. 용소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7. 정문리(旌門里)



[사진-70. 정문리 충렬정문 ]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 상홀면 정내(旌乃)로 보이나 1914년 양감면 정문리가 되었으며 현재 2개 행정리로 나뉘어져 있다. 유물·유적·건물에 관련된 지명 중 유교적인 정문으로 충효의 가르침에 따라 덕목을 딴 지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신이나 열녀·효자가 난 고장을 자랑으로 삼았고, 나라에서 그 집 앞이나 동구(洞口)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충효를 중히 여기는 미풍이 더욱 깊어져 정문 자체를 가문은 물론 그 고을의 큰 영예로 생각하여, 빛나는 얼을 잇고자 정문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 정문 1리 : 포당동과 도염의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1896년에 처음으로 상홀면 13개리 중 「포당(蒲塘)」과 「도염(道閻)」의 각각 독립된 리명으로 나오나 1914년 양감면 정문리에 통·폐합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당동은 정문이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 한 가운데에 부들(蒲)이 무성한 연못(塘)이 있었으므로 포당동, 줄못이라 부르게 된 자연지명이다. 포당동 서쪽에 갈리(葛里), 갈치(葛峙), 갈터라는 마을이 있으니 길이 갈라져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생긴 지명이다. 도염은 포당동 동쪽이며, 정문이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는 풍수지리설이 성행했던 관계로 방위나 위치에 관한 지명이 많다. 도염도 정문이 충렬문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 마을로 형성된 취락이란 뜻이다.
○ 정문 2리 : 정문이와 작은길목의 두 마을로 되어 있다. 정문이는 충열 정문이 있으므로 생긴 지명으로 정문이, 정문골이라 한다.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 충신·열녀조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임진왜란 때 충신 한명윤과 그의 아내 열녀 박씨 부인의 충절을 기려 선조대왕이 내린 충신문과 열녀문이 있다. 향토유적 제5호이며 충렬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이 유적은 1945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축물이며, 1983년에 두 분의 충절을 기리는 유적비가 오른쪽에 세워졌다. 작은 길목은 『화성지』에 상홀면 6개 동리 중 질목동(木洞)으로 나오나 1896년에 상홀면 13개리 중 길묵(吉墨)으로 되었다가 1914년에 양감면 정문리에 통·폐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길목리는 정문2리의 작은길목과 용소 4리의 큰길목으로 나뉘어졌으니 리계가 두 마을 사이의 도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마을뒷산에 참나무를 비롯한 좋은 나무가 많이 있어서 ‘참나무골’,‘진목동(眞木洞)’ 또는 ‘길목동(吉木洞)이라고 한 수목지명이다. 정문이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