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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10절 우정면(雨汀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240
제10절 우정면(雨汀面)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우정면은 예전 지명이 팔라곶면(八羅串面)과 쌍창속화방면(雙倉屬禾方面) 등으로 되어 있는데 ‘쌍창’이라는 지명은 이 곳에 곡식의 창고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그 후 『화성지』에 이르러서는 우정면으로 표기되고 있고 부 서쪽으로 80리에 24동(洞)이 있으며 예전의 화방면(禾方面)과 팔라곶(八羅串) 양면을 합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24개 동으로는 거물리(巨物里), 원종리(元宗里), 원안리(元案里), 안두촌(安斗村), 굴원리(屈原里), 포곡리(佈谷里), 봉화곡(烽火谷), 계양리(啓陽里), 만진리(晩津里), 소곶리(少串里), 파소리(播所里), 배행리(陪行里), 여소리(如蘇里), 한정리(寒井里), 달무리(達武里), 평전리(平田里), 운정리(雲井里), 고잔리(古殘里), 내운정리(內雲井里), 한각리(閑角里), 방축리(防築里), 반곡리(盤谷里), 멱동(覓洞), 창촌(倉村) 등이 보이는데 이 중 많은 마을 지명들이 지금도 그대로 불리고 있다. 1914년 우정면(雨井面)과 조암리(朝巖里), 야미리(夜味里), 마산동(馬山洞), 고기리(古機里)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압정면(鴨汀面)을 통합하여 우정면(雨汀面)이 되었다.

1. 국화리(菊花里)

『화성지』 도서(島嶼)편에 의하면 우정면(雨井面)에 구화도(九化島)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지명으로 보이며 조선 말기까지는 우정면 매향리(梅香里)였으나 1916년 10월 27일 매향리에서 분리되어 국화리로 개칭되었다고 전하는데 섬의 생김새가 국화꽃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 입파도(立波島)〔이베섬〕 : 국화섬 북쪽에 있는 섬이다.

2. 매향리(梅香里)

우정면의 매향리를 옛 문헌인 『화성지』에서 살펴보면 압정면(鴨汀面)의 고온포(古溫浦)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지금의 매향리는 원래의 지명이 고온포였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 서원과 구장이라는 두 사람의 문장가가 있어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서원은 매(梅)자를 구장은 향(香)자를 짚어서 매향리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하며 이 마을 해변에 한국전쟁이후에 미군이 공군 사격장인 쿠니 사격장을 설치하여 여러 가지로 한·미간에 문제가 야기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진-71. 매향리 쿠니 사격장 (2000) ]​

○ 가로지(加老地) : 조선조 중엽까지 향음(鄕音)으로 가을오지(可乙吾地)라고 불려오다가 지금의 가노지로 전화되었다고 하는데 조선 말엽 실학자(實學者)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에 다녀오다가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고 마을이 마음에 들어 나이 들어 노후에 낙향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을오지라 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로지(加老地)로 적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이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고온리(古溫里) : 조선조 때에는 압정면(鴨汀面)의 고온포(古溫浦)로서 지형적으로 해안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한 포구라는 의미의 지명이었으며. 예전부터 이 마을의 주민이 인심이 온후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잘 지내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고온포 또는 고온리라고 불리어 전해졌다.
○ 고잔(古棧) : 해안 마을에서 내륙 쪽으로 자리잡은 마을 다시 말하면 고지(串)의 안(內)이란 뜻에서 유래한다고 전하는데 『화성지』에 의하면 우정(雨井)면에 고잔(古棧)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고잔리가 한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놋우물 : 일제 말기 일본인들이 전쟁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하여 놋그릇 등의 쇠붙이 공출이 심하여 마을 주민들이 마을 앞 공동우물 속에 놋그릇을 감추었다고 하여 유래한다고 전한다.

3. 멱우리(覓祐里)

『화성지』에서 우정면의 24개 동 중에 멱동(覓洞)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까지는 멱동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말엽에 일본 군인이 이 마을의 여인을 애첩으로 삼아 임신까지 시키게 되자 마을 주민들이 이것은 민족의 수치라고 하여 이 여인을 찾아 참수함으로써 찾을 멱(覓)자와 도울 우(祐)자를 따서 멱우리라 부르게 된 것에서 마을 유래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가래골 : 예전부터 이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방축동(防築洞) : 『화성지』에는 우정면에 방축리(防築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까지는 우정면 방축리였다. 이 마을은 예전에 넓은 벌판이 있었으나 관계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오래 되거나 또한 장마가 져서 물이 불으면 흉년이 자주 들어 제방(防築)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게 되었으며 이후부터 방축리 또는 방축동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서리실 : 구전에 의하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생김새가 마치 뱀이 서리를 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은행나무골〔행정동(杏亭洞)〕 : 글자 그대로 예전에 마을 한복판에 큰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창말〔창촌(倉村)〕 : 『화성지』에는 우정면에 창촌(倉村)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우정면 창촌이었다. 이것은 조선 정조시에 쌍봉(雙峰)산 밑에 설치한 쌍부창(雙阜倉)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 마을로 옮겨지면서 곡식 창고가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4. 석천리(石川里)

예전부터 돌이 많아 붙여진 돌팍산이라고 불리는 산 아래 마을이 생겼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고시내)이 있어 석천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가래(佳來) : 조선 말엽에 이 마을에 그네가 있어 그네 타는 마을이라 하여 〔추천곡(韆谷)〕로 불리다가 마을에 정자가 있다 하여 〔정자곡(亭子谷)〕로 되었고 고온포(古溫浦)를 통하여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 이 마을의 아름다운 정경을 극찬하여 가래(佳來)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낭개〔낭포(浪浦), 낭천(浪川)〕 : 아주 오랜 예전에 이 마을 앞까지 바다 물이 들어와 이 마을 앞에서 물결이 심하게 굽이쳐서 낭포(浪浦) 혹은 낭개(浪川)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돌패기〔돌팍내〕 : 마을 뒷산에 있는 돌팍산에 돌이 많이 묻혀 있어 근방의 주민들이 돌을 파내는 마을이란 뜻에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오류올〔오류동(五柳洞)〕 : 예전 이 마을 주변에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아름답고 경치가 좋아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오류동이라고 불려지다가 뒤에 오류올로 전화(轉化)되었다고 전한다.

5. 운평리(雲坪里)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 운정리(雲井里)와 평전리(坪田里)가 나란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우정면 운정리와 평전리로 불리다가 두 마을을 통·폐합하여 운평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구전에 의하면 운정리는 마을의 우물에서 구름처럼 안개가 피어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구름처럼 둘러 있으며 마을 가운데 물맛이 좋고 샘이 잘 솟는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하며 평전리는 들판이 평평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바라고지〔바라곶, 파라곶, 파라곶동, 고잔〕 : 운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 구름울(雲井里) : 이 마을이 구름 아래 있는 것처럼 산이 둘러 있고 마을에 물맛이 좋고 샘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조선 말엽까지는 운정동이라 불렸다.
○ 벽장골 : 이 마을은 본 마을과 너무 동떨어진 산 속의 험한 곳에 형성되어 있어 벽장 속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이 본래 마을의 첫 어귀에 위치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평말〔평전리(坪田里)〕 : 이 마을이 밭(田)과 같이 평평한 곳에 위치한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6. 원안리(元安里)



[사진-72. 원안 3리 달무지마을 입구 ]

『화성지』 우정(雨井)면의 24개 마을 중에 원안(元案)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이 마을은 원안리(元案里)로 불렸다고 본다.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이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물이 귀하여 우물을 파게 되었고 우물을 파는데 샘이 터져 마을이 잠길 정도가 되어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는데 마침 마을을 지나던 스님도사가 큰 바윗돌로 막아 주니 샘이 알맞게 솟고 마을도 편안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원안(元安)이라는 마을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 거물리(巨物里) : 『화성지』의 우정면에 거물(巨物)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에도 거물리로 불렸던 것으로 보이며 마을에서 전하는 구전은 조선 중엽 연안 김씨 성의 고관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이 거물(巨物)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널우물 : 예전에 이 마을에 샘이 잘 솟는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 위를 널판으로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달무지 :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 달무리(達武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글에 통달한 인재가 많아 달문(達文)이라 부르다가 달무지로 변했다는 설과 마을 앞에 달처럼 생긴 연못이 있어 달못이라고 부르다가 달무지 또는 월지(月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7. 이화리(梨花里)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서 살펴보면 압정면(鴨汀面) 주곡리(舟谷里)가 보이는데 이 뜻은 마을 앞까지 배(丹)가 드나들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뱃곡(舟谷)이라 불려지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구역이 통·폐합 될 때에 배가 다니는 마을이라는 뜻을 잘못 알아들어 배골(梨谷)으로 생각하고 이화리(梨花里)로 오기(誤記)하여 그대로 통용되었다고 전한다.
○ 당골〔당곡(堂谷)〕 : 『화성지』 압정면의 20개 마을 중에 당곡리(唐谷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보인다. 한편 마을에서 구전되는 내용은 조선 말엽 이 마을에는 다섯 집이 있었는데 서씨(徐氏) 집에 후손이 없어 걱정하던 차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당(堂)을 짓고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앞산에 당을 짓고 백일 기도를 정성껏 드린 결과 아들을 낳게 되었고 이 때부터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 덕목동(德目洞) : 『화성지』 압정면에 덕목리(德睦里)가 있는데 이 마을 역시 이 지명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추측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는 예전에 이 마을에 한(韓)씨와 김(金)씨 두 집안이 살았는데 두 집안이 항상 서로 도우며 안팎이 화목하게 잘 살아 인근의 주민들이 덕목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맹곶(孟串) : 『화성지』의 압정면에 맹곶리(孟串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맹곶리였으며 예전 이 마을에 맹(孟)씨가 처음 살게 된 고지(串)라는 뜻에서 맹곡이라 붙여졌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마을의 생김새가 누에고치와 비슷하게 생긴 곶(串)이라 하여 뱅곶 또는 맹곡(孟谷)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벌말 : 마을이 평평한 넓은 들판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사두곶 : 예전에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사두질을 하여 고기를 잡던 곳인데 1960년대에 간척공사로 만(灣)이 막히게 되자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 한다.
○ 안골(內谷) :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불노산(不老山)에서 바라보면 이 마을 골짜기가 안쪽(內)으로 내곡(內谷)과 같은 뜻인 안골, 안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 이곡동(梨谷洞) : 조선 말엽까지 이 마을 앞으로 배가 드나든다고 하여 배곡(舟谷里)으로 불렸는데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무지한 행정관리가 배가 드나드는 곳을 배(梨)로 잘못 알고는 이곡동(梨谷洞)이라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만 된다고 믿는다.

8. 조암리(朝岩里)

1831년에 간행된 『화성지』 압정면의 20개 마을 중 조암(朝巖)리가 보이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조암(朝岩)리라고 생각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것은 예전에 이 마을 안에는 큰 차돌바위가 있어 아침에 해가 솟으면 햇빛이 차돌바위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퍼지면서 아름답게 보여 아침돌(朝岩)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조암리(朝岩里)로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73. 장안여중 옥상에서 바라본 조암 시가지 전경(1995) ]

○ 낡은아실〔구아실(舊衛室)〕 : 예전에 이 마을에 지방관아(官衙=官廳)가 있었으나 없어지고 후에 그 곳에 마을이 생기자 예전에 관아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구아실(舊衙室)로 쓰여지다가 낡은 아실이라는 순 우리말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마산동(馬山洞)〔말미〕 : 『화성지』의 압정면에 마산동(馬山洞)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는 마산동, 마산리로 불렸으며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지형이 흡사 말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말미(馬尾)로 불려오다가 뒤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마산동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 수정동(壽亭洞) : 예전에 이 마을에는 아주 오래된 고목 정자나무가 있어 오래된 정자나무골이란 뜻에서 수정(壽亭)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조암동(朝岩洞)〔도래말〕 : 예전에 이 마을에는 같은 씨족끼리 모여 사이좋게 잘 산다고 하여 도래말이라고 불려오다가 행정 이명(里名) 통·폐합 때에 조암동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 조원동(朝元洞)〔아침돌〕 : 예전에 이 마을에 차돌바위가 있어 아침해가 솟으면 햇빛에 차돌에 반사되어 광채가 아름답게 빛나므로 아침돌이라고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웃마을인 도래말이 이미 조암동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어 이 마을이 원래의 조암동이라는 뜻으로 조원동(朝元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9. 주곡리(珠谷里)



[사진-74. 주곡리 포구(2002)]

이 마을 앞산에는 구슬처럼 보기 좋은 바위가 많았고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고 넉넉하다 하여 구슬이라고 불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한자로 쓰면서 주곡(珠谷)리로 불리게 되었는데 『화성지』의 압정면 편에 주곡리(舟谷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배가 닿는 포구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구슬 : 마을 앞산에 구슬처럼 둥글게 생긴 바위가 많고 마을 주민들의 인심도 둥글둥글 모가 나지 않으며 마을 주변의 산지형도 둥글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바소개 :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엽 숙종(肅宗)조 때에 마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자 임금이 순행하게 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벼타작(벼바심)하는 모습을 살펴보다가 이 마을은 벼바심을 하는구나 하는 안도의 말을 남기
고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이 마을을 벼바심의 바자와 소(沼 : 연못)의 소자에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을 합하여 바소개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박우물 : 이 마을 한가운데에 물맛이 좋고 샘이 항상 넘치는 우물이 있어 바가지로도 물을 풀 수 있어 박우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75. 주곡리 선창 ]

○ 선창(船艙) : 옛날 이곳 해변에 포구가 생기면서 배가 닿을 수 있도록 잔교를 설치하였는데 이 때부터 어촌이 형성되어 선창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항상 외지의 많은 사람들이 수산물을 구하고 회를 먹기 위하여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 원목동(元目洞) : 예전에 이 마을 앞이 바다였기 때문에 바닷물을 막아 논으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 제방의 목쟁이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쪽다리 : 예전에 이 마을 앞에 나무로 만든 좁은 다리가 있었으며 이것으로 하여 쪽다리가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0. 한각리(閑角里)

이 마을은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도 한각리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에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 뒷산은 학이 많이 날아와 학뿌리로 불려지다가 한뿌리로 전음되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한각리로 바뀌어 불려졌다.
○ 솔안〔송내(松內), 송내동(松內洞)〕 : 마을에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 이 마을 최(崔)씨 성을 가진 사람이 숲을 잘 가꾸고 특히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잘 가꾸어 인근에서 송내동 혹은 솔안말 등으로 불려지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죽말〔죽촌(竹村), 죽리(竹里)〕 : 예전에 이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1. 호곡리(虎谷里)



[사진-76. 한각리 마을 전경 ]

이 마을 주변의 산의 생김새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범아지로 불려오다가 뒤에 한문으로 옮기면서 호곡(虎谷)리로 정해졌다고 전해진다.
○ 백년거지(百年居地) : 조선시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정창연이란 선비가 학뿌리에 3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가 난이 끝나고 마을을 떠나며 이 마을은 난을 피하여 백년간은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고 말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학뿌리 : 마을의 생김새가 학의 부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의 끝이 학의 부리처럼 길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범아지 : 마을 주변의 산세가 호랑이처럼 생긴 데서 번아지로 불리다가 나중에 호곡동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 봉곡동(烽谷洞) :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 봉화곡(烽火谷)이 봉곡동이다. 마을이 봉래산 아래 있어 봉골에서 봉곡으로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서 봉화곡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봉화와 관련하여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새터말〔신촌(新村), 신기촌(新基村)〕 : 마을 주민들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새로 정해진 마을인지가 분명치 않다.
○ 안두미〔안곡(安谷)〕 : 호곡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며 중심이 되는 곳으로 주민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동네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화성지』의 우정면 편에 보면 안두촌(安斗村)이 있는데 이 마을의 옛날 지명으로 보인다.
○ 점말〔점촌(店村)〕 : 예전에 이 마을에 항아리를 비롯한 옹기를 굽는 곳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2. 화산리(花山里)



[사진-77-1. 화산 2리 한마을 전경]



[사진-77-2. 화산 2리 한마을 입구 표석]​

『화성지』의 압정면(鴨汀面)에서 살펴보면 한촌(閑村)과 일원리(一院里) 등이 보이는데 현재의 화산리 일대의 옛지명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마을이 낮은 야산으로 둥글게 둘러 싸여 있었으며 봄이 되면 산과 들에 진달래를 비롯한 여러 꽃들이 어우러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배미(율리) : 예전에 이 마을 주변에는 밤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밤나무골 혹은 밤이 등으로 불리다가 배미로 전음(轉音)되었으며 한자로 율리(栗里)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 사기말〔사기곡(沙器谷)〕 : 아주 오래 전에 이 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중국과 무역하는 배가 드나들었고 어느 날 사기그릇을 가득 실은 배를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엄나무에 매어 놓았으나 밤사이에 심한 풍랑으로 배는 파선하고 사기그릇만 마을 여기저기에 널려지게 되었으며 이 후부터 사기말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 일원동(日院洞) : 원래는 일원(一院)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화성지』 우정면 편에 보인다.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국과 무역하는 상인, 왕래하던 사신과 관원들의 편리를 위하여 이 마을에 숙소가 있었던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장자터 :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일설은 예전에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마을에 나그네를 위한 주막거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한말〔한촌(閑村)〕 : 『화성지』의 압정면 편에 한촌(閑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도 이 같이 불린 것으로 추측되며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에 한(韓)· 천(千)· 김(金)씨 등의 세 성이 살았는데 그 중에서 한씨네가 번성하여 한씨 촌으로 불려지다가 전음되어 ‘한마을’ 다시 ‘한말’로 변했다는 설과 마을이 한적하고 살기가 좋은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두 가지 설이 유래되고 있다.​

13. 화수리(花樹里)



[사진-78. 화수 3리 여술마을 입구 ]



[사진-79. 화수 4리 조문말 전경]​

『화성지』 우정면의 굴원(屈原)리는 지금의 화수리 일대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 말엽 마을 주민들이 항상 부지런하고 애향심이 깊어 협동하여 마을 주변의 산에 유실수를 많이 심고 꽃과 나무를 잘 가꾸어 마을 경관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굴원리(屈原里) : 조선 말엽 이 마을의 행정구역 이명(里名)이 굴원리였는데 이것은 마을의 생김새가 길게 구불구불하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여술〔여수동(麗水洞)〕 : 마을에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 우물이 두 개 있었는데 한 우물에서는 어느 날 장수가 나왔고 또 다른 우물에서는 용마(龍馬)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마을의 우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샘이 잘 솟으며 물맛도 좋아 인근에서 여수(麗水)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여술이라고 하였다.
○ 조문말〔조문촌(趙門村)〕 : 조선조 중엽 한양 조씨 12대 선조가 이 마을로 낙향하여 터전을 잡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