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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11절 장안면(長安面)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75
제11절 장안면(長安面)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서 보이는 장안면(長安面)은 장내리(場內里), 독정리(獨亭里), 신촌리(新村里), 원당리(院塘里), 감촌리(甘村里), 거묵리(拒墨里), 화전리(花田里), 가장촌(可裝村), 방축동(防築洞), 이물촌(利物村), 석포리(石浦里), 양촌리(楊村里), 대유정리(大有井里), 아강동(兒强洞), 장작동(長作洞), 거산리(巨山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 지명 중 상당수가 현재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한편 장안면에 통합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정면은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부 서쪽으로 40리에 위치해 있고 276호에 인구가 1,161명으로 나타나 당시로서는 작은 곳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장안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안면과 초장면(草長面)을 병합하여 형성되었다. 『화성지』 방리 편에 따르면 초장면은 남쪽으로 70리 거리에 위치하며 노정동(魯亭洞), 진목리(眞木里), 흥천리(興天里), 신언리(新堰里), 구천리(舊川里), 덕다곶(德多串), 독지동(獨之洞), 어은동(魚隱洞), 사랑리(沙浪里) 등 9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금의리(錦衣里)



[사진-80. 금의 3리 당골마을 입구 표석 ]



[사진-81. 금의 2리 원금의마을입구 ]​

『화성지』 초장면(草長面)의 진목리(眞木里)와 우정면(雨井面)의 오동 일대가 오늘날의 금의리라고 전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이 마을은 안동(安東) 김씨의 집성촌이었는데 나이든 선비 한 분이 오랜 공부 끝에 과거에 급제하여 귀향했다고 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의미로 마을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 사람 중에 벼슬로 출세한 사람이 많아서 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졌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금의리로 정해졌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마을의 생김새가 거미처럼 생겨서 거미, 그미, 금의로 변했다는 설도 전하고 있다.

○ 당골〔당곡동(堂谷洞)〕 : 『화성지』의 압정면(鴨汀面)에 당곡리(唐谷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의 옛 지명이라고 추측된다. 예전에 서신면의 당성(唐城)과 연결되어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이 이 마을을 근거로 정착하면서 원주민들과는 격리된 채 자기들끼리만 영위하게 되니 인근 마을에서 당용동(唐容洞)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같은 연유에서 당골(唐谷)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 말엽에 이곳의 지명이 압정면 당곡리(唐谷里)로 정해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서 전하는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 입구에 예전부터 당(堂)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하는데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 먹절이〔묵사동(墨寺洞)〕 : 예전이 이 마을 뒷산에 사찰이 하나 있었는데 사찰이 없어지면서 인근 마을에서는 먹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절명이 무엇인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 솔안말〔송내동(松內洞)〕 : 예전에 이 마을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어 소나무 숲 안의 마을, 솔밭 안 동네, 솔안 마을, 솔안말로 불려지면서 생긴 것이라고 전한다.
○ 원금의(原錦衣) : 주민의 수가 증가하면서 마을도 커지게 되어 2개의 마을이 되니 원래 있던 금의리를 원금의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2. 노진리(蘆眞里)

이 마을은 예전에 해안 부근 넓은 벌판에 많은 갈대가 자생하였으며 본래는 수원부(水原府) 초장면(草長面) 지역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남양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고잔(古棧)·진목동(眞木洞)· 족다리· 노정동(蘆亭洞) 등을 병합하여 노정동의 노(蘆)자와 진목동의 진(眞)자를 따서 노진리로 하고 수원부 장안면에 편입시켜 현재에 이르렀다.
○ 갈우물〔노정(蘆井)〕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편에 대유정(大有井)리가 보이는데 당시의 마을 이름이다. 예전부터 이 마을 앞 벌판에는 갈대밭이 넓게 우거져 있었으며 그 가운데 큰 샘(우물)이 있어 마을의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로 이용하였고 마을에서는 갈대밭 속에 있는 우물이라 하여 갈우물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 고잔(古棧) : 이 마을은 고지(串) 안(內)의 복합어로서 해안 깊숙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곶(串)의 안쪽 다시 말해 내륙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노진주택(蘆眞住宅) : 정부에서 아산과 남양만의 간척사업을 1977년에 시작할 당시 건설 현장이었던 곳을 공사가 끝나고 택지로 조성하여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족다리〔족교동(足橋洞)〕 : 예전 갈대밭이 있는 벌판에 징검다리 식의 쪽나무 다리가 있어 갈대밭을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서 가게 되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참남기〔진목동(眞木洞)〕 : 『화성지』의 초장(草長)면 편에 진목(眞木)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 때에도 불려진 마을 이름이다. 이 곳은 예전부터 참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인근 일대의 주민들이 흉년이면 참나무의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굶주림을 해결하였다고 하여 인근 마을에서는 참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에서 참남기라 부르고 한자로는 진목동이라고 썼다고 한다.

3. 덕다리(德多里)



[사진-82. 덕다리 구래마을 전경 ]



[사진-83. 덕다리 원덕다마을]

『화성지』에서 살펴보면 초장면(草長面) 덕다곶(德多串)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1895년(고종 32)에는 남양군으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비로소 구래「구천(龜川)」와 절골말「사곡동(寺谷洞)」을 병합하여 수원군 장안면에 편입되었는데 이 마을은 원래 언덕으로 되어있어 서 덕미, 덕대, 덕다 등으로 불려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 주민이 평소 덕이 많으며 후덕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 구래〔구천(龜川)〕 :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거북이가 많았다고 하여 거북이 시내의 뜻을 지닌 구천동(龜川洞)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전음되어 구내에서 구래로 변하여 불려졌다고 전한다.
○ 문화촌(文化村) : 예전에는 이 마을이 습지로 수렁이 많은 수렁계라고 불리던 곳인데 1958년부터 몇몇 집이 모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인근 마을에서는 난민촌이라고 불렀으며 1959년 서해안 바다를 매립하여 간척사업을 펼칠 때에 공사의 책임자가 문화 유(柳)씨라는 연유로 문화촌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원덕다(元德多) : 조선시대 말엽의 초장면 덕다곶(德多串)이란 마을이 원덕다 마을이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는 조선 중엽에 소터굴이라는 곳에 남원 양(梁)씨가 이주해 와서 마을 주민들과 상부상조하며 잘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주해 온 사람이나 현 주민 모두가 덕(德)이 많고 인심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은 예전에 해안 지방으로 곶이 많아서 다시 말하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원래의 덕다리를 말함이다.

4. 독정리(篤亭里)



[사진-84. 독정리 원독정마을 전경]​

『화성지』의 장안면에서 독정리(獨亭里)와 감촌리(甘村里) 일대가 오늘날의 독정리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 예전에 항아리 등의 옹기를 파는 독점(篤店)이 있어 독점 또는 독정이라고 불려왔다는 설과 이 마을 한 가운데 큰 느티나무 한 그루에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독정리(篤亭里)로 되었다.

○ 감드러지〔감촌(甘村)〕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에 감촌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도 그렇게 불려졌으며 마을에서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마을과 마을 사이의 논을 감이라고 했으며 논두렁을 건너야 다른 마을에 갈 수 있는 까닭에 감두렁이 감드러지로 전음되었으며 이 말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예전에 이 마을에서 달고 맛있는 엿을 만들었다는 데서 감촌(甘村)이란 마을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거묵골〔감묵골〕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에 거묵동(巨墨洞)이 나타남으로써 조선 말엽부터 불려진 마을이름이라고 보여진다. 마을에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작은 부락이 향촌 생활을 잘하고 마을끼리 서로 단합하자는 뜻에서 감묵이라고 부르다가 원래의 마을 이름인 거묵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고해(孤海) : 이 마을이 예전에는 서해의 바닷물이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버선말 : 이 마을 앞에 있는 산의 형국이 흡사 버선을 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 원독정(原獨亭) : 이 마을은 예전부터 항아리를 비롯한 독(甕器)을 굽는 곳이 있어 붙여졌으며 마을 한가운데 큰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활터골 : 이 마을이 예전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마을의 생김새가 활(弓)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5. 사곡리(沙谷里)



[사진-85-1. 사곡 4리 밤밭마을 입구 표석]



[사진-85-2. 사곡 4리 밤밭마을 입구 ]

이 마을은 역시 『화성지』의 초장면 지역으로 흥천리(興天里) 장작원(長作院) 일대가 오늘날의 사곡리로 보인다. 이 마을은 원래가 서해의 바닷물이 이룬 모래펄로 이루어져 모래골, 모새골 또는 사곡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밤밭(栗田)·먹고지·장자터·분터골·계룡고지·흥천(興天) 등의 부락을 병합하여 장안면 사곡리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대사곡(大沙谷) : 예전에는 이 마을에 대인(大人), 다시 말하면 양반들만 살던 곳이라 하여 대사곡이라 하고 천민이나 평민이 살던 곳을 소사곡(小沙谷)이라 구분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소사곡(小沙谷) : 대사곡에 대칭하여 평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먹고지〔먹구지〕 : 예전에 이 마을로 미역을 따거나 실은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미역고지에서 멱고지, 다시 먹고지로 전음된 것이라고 한다.
○ 용토(龍土) :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 용(龍)씨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욕심이 많고 인정이 없는 사람으로 아리따운 무남독녀를 키우며 살았다. 이 처녀가 나이 18세가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처녀가 꿈을 꾸는데 서해의 용왕이 보냈다는 귀공자가 나타나 서로 정을 통하게 되었고 그 후 백일이 지나 잉태하게 되자 소문이 마을에 퍼지니 용씨가 딸을 묶어 놓고 돌로 쳐 죽이려 할 때에 집 뒷뜰의 우물에서 숫용이 나타나 처녀를 업고 사라졌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용천(龍泉)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남아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장자터〔장자기(長者基)〕 : 이 마을은 조선시대 때에 백두락 이상의 논농사를 지으며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사는 큰 부자(富者)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흥천(興天) : 『화성지』의 초장면(草長面) 마을 편에 흥천리(興天里)가 보인다. 마을에서 전래되는 전설에 의하면 여러 가지 설이 전하는데 일설에는 이 마을에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마을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로도 이용하여 흥천(興泉)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마을이 날로 흥할 부락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은 하늘이 흥하도록 보살피는 마을이라 흥천(興天)이라는 설도 전한다.​

6. 사랑리(沙浪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초장면(草長面) 마을 편에 사랑리(沙浪里)라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 이전부터 쓰여진 마을 이름이다. 당시에는 새랭이 혹은 사랑동 등으로 부르다가 1895년(고종 32)에 남양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금의 장안면 사랑리가 되었는데 이 마을은 예전에 서해안의 바닷물이 밀려오는 맨 끝 지역으로 고운 모래사장의 어귀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금계동(金鷄洞) : 마을에서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 주민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는데 어느 날 풍수지리에 능한 사람이 마을의 형국이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하며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쇠판이 :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소의 먹이인 풀이 많고 넓은 숲이 있어 소의 풀이 많은 넓은 들판을 줄여 쇠판이라고 했다는 설과 쇠(금)를 파내는 마을이란 뜻에서 쇠판이라고 마을 이름을 붙였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7. 석포리(石浦里)〔돌소지〕



[사진-86. 석포 2리 버들마을 입구]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 마을 편에 석포리(石浦里)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마을 이름이다. 1895년(고종 32) 남양군 장안면에 일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오늘날의 장안면 석포리가 되었으며 예전부터 돌이 많은 포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무봉동(無鳳洞)〔무봉골(無鳳谷), 막바지〕 : 무봉산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석포리의 맨 끝에 위치한 마을이라 막바지로 불리기도 하였다.
○ 버들〔양촌(楊村)〕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 마을 편에 양촌(楊村)리 표기되어 있다. 예전부터 마을 앞의 들판을 버들이라고 불렀으며 일제 때에 저수지를 만들고 버들저수지라고 하였는데 벌판 둑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야광동(野廣洞)〔들너비, 드레비〕 : 이 마을 앞의 들판이 넓다고 하여 야광(野廣) 또는 들너비라고 불렸다고 전하며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이 예전에 삼괴반도에서 두레패(농악)놀이를 가장 잘 하는 마을이라고 하여 두레비로 불리다가 드레비로 전음되었다고 한다.
○ 이물이(利物伊) : 이 마을 역시 『화성지』 장안면 마을 편에 이물촌(利物村)으로 표기되어 있는 마을로 마을 주민들이 인심 후하고 정이 많으며 외지에서 장사꾼이 오면 많이 사주었던 곳으로 외지 사람들이 이 마을로 물건을 팔기 위해 오면 이득이 많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석교(石橋) : 예전부터 석포리 일대가 돌이 많아 지명에도 많이 보이는데 원래의 이름은 채골이라고 전하며 1930년 간척사업을 하면서 제방을 석축으로 쌓은 후 방농장(方農場), (방응모(方應謨)라는 사람이 간척사업을 펼침)으로 불리다가 최근 제방의 수문을 돌로 쌓게 되면서 석교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8. 수촌리(水村里)



[사진-87. 수촌리 마을 전경 (2000) ]​

이 마을은 원래 수원부 화방면(禾方面) 지역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남양군 장안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방축말·배다리·감나무골·가장말·꽃밭·항골· 용당골 등의 마을들을 병합하여 수촌리로 개칭하여 오늘날의 장안면에 편입되었는데 이 마을은 예전부터 풍수학자들이 우 청룡(靑龍), 좌 백호(白虎)의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으며, 주위가 숲이 무성하고 물이 흔한 곳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라 숲말 혹은 수촌(水村)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 감나무골〔시목동(枾木洞)〕 :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마을 곳곳에 감나무가 많이 자생하였으며 이곳의 감이 인근부락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감나무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시목동(枾木洞)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 방축말〔방축리(防築里)〕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에 방축동(防築洞)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말엽부터 불려졌으며 예전에 이 곳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갯골을 막아 제방을 축조한 이후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용당골〔용당곡(龍堂谷)〕 :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화전(花田)리이다. 『화성지』의 장안면에 화전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전라감사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석문(石門)을 열고 보니 꽃밭이 있고 꽃밭 속에 대나무 숲이 있었으며 건너편을 바라보니 용이 승천하고 있어 이 때부터 꽃밭 용당골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우물은 용천(龍泉)이라 불렀으며 더운 여름철에도 얼음처럼 찬 샘물이 솟고 물맛 또한 좋다고 전한다.
○ 큰말〔대촌(大村)〕 : 수촌리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 예전부터 금령(金寧) 김씨의 집성촌으로서 처음 형성된 큰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항골〔항곡(港谷)〕 : 조선시대 중엽까지 이 마을에 서해를 통한 배가 정박하는 항구 구실을 하여 지금도 항골이라 부르고 있다.​

9. 어은리(漁隱里)



[사진-88. 어은리독지골 전경 ]

이 마을 역시 『화성지』 초장면(草長面)에 어은동(魚隱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옛날에는 바닷가 마을이었고 물고기가 마을 어귀로 몰려와 숨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배들이 풍랑을 만나면 이곳으로 피하여 정박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기린골〔기린곡(驥麟谷)〕 :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마을에 있는 남산의 정상에 올라 바라보면 마을이 아름답기가 그림 같다 하여 그림골로 불리다가 기린골로 되었다는 설과 또한 일설에는 옛날 마을 숲 속에 기린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독지골〔독지곡(獨之谷)〕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초장면 편에 독지동(獨之洞)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 이전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에서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에 장희빈을 옹호하던 호조참판 이주학이 장희빈이 사사된 후 이 곳으로 낙향하여 남산 골짜기 숲 속에 은거하여 혼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예전에 정절은 곧고 미색이 뛰어난 과부가 혼자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돌뿌리 : 삼괴반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주요 길목으로 돌아가는 곳이라 하여 돌부리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돌뿌리로 전음된 것이라고 한다.
○ 바람고지 : 예전에 고을의 유수를 비롯한 벼슬관들의 행차가 있으면 인근의 유생들이 이 곳에 와서 모시거나 따랐는데 처음에는 배행(陪行)고지 혹은 배향(背向)고지로 불리다가 전음 되어 바람고지로 불렸다는 설과 이곳이 예전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붙여진 것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은골〔은곡(隱谷)〕 : 조선시대 중종 때에 을묘사화(乙卯士禍)에 연루된 경주(慶州) 이씨인 이인석(李仁碩)이 낙향하여 이 곳에 은거하면서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20여대에 걸쳐 살아오고 있는데 이 마을 앞은 나무숲으로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절골〔사곡(寺谷)〕 : 아주 오래 전에 이 곳에 절이 있다가 없어져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마을에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절 옆에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구멍에서 쌀이 계속 나와 그 절은 양식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욕심 많은 스님 한 분이 구멍을 크게 만들게 되었는데 쌀 대신 벌레가 나와 그 절이 폐사(廢寺)되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 점말〔점촌(店村)〕 : 예전에 이 마을에서 항아리를 비롯한 옹기를 굽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10. 장안리(長安里)



[사진-89-1. 장안 9리 당골 입구]​



[사진-89-2. 장안 9리 당골 전경 ]​

『화성지』의 장안면(長安面) 마을 편에 16개 마을 중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장내리(場內里)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 마을이 오늘날의 장안리이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 말을 사고 파는 마장(馬場)이 서서 마장(馬場)리로 부르다가 장내리로, 다시 오늘날의 장안리가 되었다.

○ 고잔(古棧)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에 고잔리가 표기되어 있으며 옛말 중에 곶(串)이 있는 곳에서 많이 쓰이는 지명으로 예전에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닿던 곳이라 고지(串)의 안(內)에서 고잔으로 변하면서 한자로는 고잔(古棧)으로 쓰여 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 당골〔당곡(堂谷)〕 : 당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기도 하며 또한 일설에는 이 마을에 당을 짓고 사는 무속인(巫俗人)이 있었는데 인근에 많은 사람들이 당골로 찾아와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 물구리〔수곡(水谷)〕 : 마을 앞의 산기슭을 말하며 가뭄이 심해도 이 곳은 물이 마르지 않는 수렁 같은 골짜기라 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상두원(桑頭院) : 마을 중앙에 위치한 산의 줄기가 마치 누에가 기어가는 형국이고 마을의 생김새 역시 뽕나무밭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온수골〔온수곡(溫水谷)〕 : 이 마을에 있는 우물의 샘이 다른 마을의 우물물보다 따뜻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큰터골 : 이 마을이 앞으로 크게 번성해 달라는 기원에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아가골 :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장안면 마을 편에 아강동(兒强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에서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애장골(兒葬谷)로 불렸는데 이것은 이 곳에 애기 무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 아기들이 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달라는 기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