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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을이름 제13절 태안읍(台安邑)

카테고리
화성의 지명유래
작성자
화성문화원
작성일
2025-04-11
조회
67
제13절 태안읍(台安邑)

태안읍은 조선 초기 수원부(水原府) 읍치(邑治)가 위치하였던 곳(안녕리(安寧里), 송산리(松山里) 일원의 지역)으로 정조(正祖) 임금 때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기기 위하여 주민을 지금의 수원 팔달산 부근 화성(華城)으로 집단 이주시킴으로 읍치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오랜 세월 동안 화성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그 후 1896년(고종 33) 태촌(台村), 장주(章州), 남부(南部), 안녕(安寧), 용복면(龍伏面) 등으로 편제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태촌면과 장주면 일부를 통합하여 태장면(台章面)으로, 안녕면과 용복면 일부를 통합하여 안용(安龍)으로 되었다. 1931년 태장면과 안용면 일부를 수원읍으로 내주었고, 1963년 태장면의 태(台)와 안용면의 안(安)을 합쳐 태안면으로 통합되었다. 198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11172호에 의하여 태안읍으로 승격되었다.
『화성지』에 이미 태안읍 일대의 명칭이 많이 보인다. 남부, 북부, 일용(日用), 장주(章州), 형석(荊石), 안녕(安寧), 용복(龍伏) 등의 방리(坊里)는 현재의 태안읍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태안의 태(台)는 옛사람들이 지명을 지을 때 큰 바위(巨巖)나 산정에 많이 붙이는 명칭으로서 태안읍에서는 임금의 능이 있는 화산 근처라는 의미와 황계리에 있는 고분(옛 삼국시대의 큰 지도자, 부족장이나 일대를 평정한 장군 혹은 삼국시대 통치자의 묘로 추정)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보인다. 또한 『화성지』에 따르면 방리 편에서 장주면(章州面) 9개의 동(洞) 중에 영통(靈通)이 보이고, 안녕면 9개의 동 중에는 야반정(野磻亭), 배양동(培養洞), 송산리(松山里), 곡반정(谷磻亭) 등의 현재 지명과 같은 방리가 보이고 있으며, 용복면(龍伏面)의 4개 동에는 기전리(旗田里), 상송리(上松里) 등의 방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태안의 방리가 지금보다는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1794년(정조 18)에 작성된 『수원부읍지』에 방리(坊里)편에 안녕면(安寧面), 태촌면(苔村面) 등이 모두 현재의 태안읍과 깊은 관계가 있어 비교적 오래된 면(面)으로 보여진다.

1. 기산리(機山里)

『화성지』 방리 편을 살펴보면 태촌면(台村面)에 기산리(機山里)가 보이는데 이 곳이 지금의 기산리라고 생각된다. 예전부터 틀미, 틀뫼 등으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기산(機山)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이 베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들판(평야 : 平野) 가운데 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그러나 기산리에는 뫼(산)는 없어 뫼는(買·水) 또는 (野)에서 연유되었다고 보인다. 예전 수원부 지역이 매홀(買忽)이었던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며 이 마을도 물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하면 물이 흐르는 들판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인다. 예전에는 수원군 용복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와우동과 함께 합해서 기산리로 부르게 되었다.
○ 구기산(舊機山) : 기산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을 구기산이라고 한다.
○ 아랫들미 : 기산리의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랫틀미(下機山)라고 부른다.
○ 신기산 : 나중에 생긴 마을이라 신(新)기산 이라고 부른다.
○ 윗틀미 : 위에 있는 마을이라 윗틀미(上機山)라고 한다.

2. 기안리(旗安里)



[사진-95. 기안리 마을전경 ]

『화성지』의 방리 편을 살펴보면 용복면(龍伏面)에 기전리(旗田里)가 보이는데 이 곳이 지금의 기안리(旗安里)라고 추측되며 그렇다면 기안리의 원래 이름은 기전리(旗田里)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 때 정조가 부왕 사도세자를 현륭원(顯隆園)에 모시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때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도록 이 마을에 기(旗)를 꽂게 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위치가 기 안쪽에 있다고 하여 기(旗)안의 마을이란 뜻에서 기안말이라 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 기내리(旗內里)가 되어야 하지만 기안에 있는 평온하고 평안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기안리(旗安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 고수문(古水門) : 기안리에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랫기안말이라고 불렀으며 마을에서 능으로 통하는 수문(水門)을 겸한 성문(城門)이 있었는데 이것을 옛날 성문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고수문(古水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풀수골〔풀무골, 해수동〕 : 기안말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3. 능리(陵里)

고려시대 이곳에 아기능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나 어느 임금의 자녀(아기)인지는 전혀 모르고 기록에도 없다. 『화성지』의 방리편을 살펴보면 태촌면에 능동(陵洞)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불려진 마을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 함께 능리는 능골(陵谷)로도 불려졌다.
○ 개나리 마을 : 이 마을은 집집마다 울타리를 개나리로 한 집이 많아 봄이 되면 개나리꽃 구경이 볼만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개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독재동(篤才洞) : 예전부터 이 마을 주민들이 재주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나 찾지 못할 뿐이지 분명히 이 마을 어느 곳에는 독(甕器)을 만들던 곳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전국에는 독재울 혹은 독재골 등의 마을이 많은데 대부분 독을 만들던 요지(窯地)가 있는 곳이다. 이 마을도 독재골, 독재울 등으로도 불렸으며 이것은 음편(音便)이 되면서 독재올이 되고 다시 독재울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송곡(松谷) : 마을이 예전부터 소나무가 많은 골짜기에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송골(소나무 골짜기)이라고도 불렸다. 특히 마을의 가장 중심에 있는 가운데 마을을 샛송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장산(場山) : 이 마을 한가운데 큰 언덕이 있는데 중턱에 큰 마당이 있어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놀이도 하고 추수철이 되면 타작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큰 마당이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우리말로 마당뫼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당현(堂峴) : 장산 동쪽의 마을로 능동 뒷산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이곳을 당현이라고 부르며 당고개라고도 불렀다고 전하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4. 반월리(半月里)

마을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의 집들이 반달처럼 둥글게 모여 있다고 하여 반월(半月)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며 순우리말로 부를 때에 반달리가 되나 소리 나는 대로 반다리로 불렀다고 전한다.
○ 가곡(佳谷) : 이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면 경관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이것을 우리말로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으로 가골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 당(堂)골 : 이 마을에는 예전에 신당(神堂)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단 꿀을 만드는 벌들이 많아 언제나 이 골짜기에 오면 단 냄새가 풍겨 나와 당골 또는 당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하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마성(馬城)리 : 마을 뒷산이 마을을 성처럼 감싸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말(馬)의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마성원(馬城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화성지』의 방리 편에서 살펴보면 태촌면에 마성촌(馬城村)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 전부터 불려졌던 마을 이름이라고 보인다.
○ 안반달 : 반월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반달이라고 부르는데 속에 있는 마을이라 속반달이라고도 부른다.

5. 반정리(泮亭里)

들판 한가운데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이름을 반쟁이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반정리(泮亭里)라고 쓰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이 마을이 둘로 나뉘어져 윗반정과 아랫반정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다시 말하면 온전치 못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믿는다.

6. 배양리(培養里)

이 마을 역시 『화성지』의 방리 편에 보이는데 안녕면(安寧面)에서 배양동(培養洞)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마을의 흙이 질이 매우 좋은 배양토(培養土)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우리말 이름으로는 배양치 혹은 뱅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예전에 이 마을에 뱀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 제청(祭廳)말 : 배양리의 동쪽의 마을로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부왕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隆陵)으로 옮긴 후에 이 마을에 제청(祭廳)을 차렸다고 하여 제청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연백촌(延白村) : 한국전쟁 1·4후퇴 후에 이 곳에 황해도 연백군 사람들이 많이 피난와 정착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연백촌 혹은 연백수용소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7. 병점리(餠店里)



[사진-96. 병점 사거리 ]

예전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삼남의 큰 길목이었던 마을로 수원군 시절 태촌면에 속하였으며 현재도 병점역이 있어 왕래가 많은 마을로 예전(고려시대)부터 행인의 왕래가 많아 행인이 쉬었다가 가게 되었고 행인의 요기를 덜어주기 위한 떡장수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떡전거리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떡(떡병 : 餠)을 파는 점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귀봉동(龜峰洞) : 마을 뒤에 있는 산의 봉우리가 멀리서 바라보면 기어가는 거북이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순우리말로는 느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전한다. 한편 『화성지』에서는 태촌면(台村面)에 귀봉리(龜峯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이 귀봉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점촌(店村) : 예전에 옹기와 같은 전통 항아리 등을 구워 팔던 점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에 연유하여 점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 안화동(安化洞) : 귀복동(느치미) 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순흥(順興) 안(安)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여 안화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소리나는대로 부를 때에 아나동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 평촌(平村) : 병점리의 가장 남쪽 마을로 넓은 벌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벌말(벌판에 있는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평촌(平村)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오산시 외삼미동 마을 주민들은 이 곳을 벌말이라고들 부르고 있다.

8. 송산리(松山里)



[사진-97. 원송산 마을 입구 ]

송산리는 고려시대부터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 있던 곳으로 읍을 다스리던 마을이며 조선 1789년(정조 13) 양주군 배봉(拜峯)산에 있던 부왕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佑園)을 이 곳 화산(花山) 아래로 옮기고 마을 주민들을 모두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면서 화성을 쌓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으므로 이 송산리 일대가 본래의 수원이라 할 수 있다. 옛 지명에 많이 나오는 마을 이름으로 이 마을도 예전 조선 정조 때에 이 곳에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어 오고 조림할 때에 소나무가 많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솔뫼마을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송산(松山)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 한편 『화성지』에서도 안녕면에 송산리가 보인다.

○ 원송산(元松山) : 처음에 생긴 송산리가 매우 크게 번창하여 인구도 많이 늘고 마을도 커졌으므로 처음의 송산리를 처음 생긴 송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작현(鵲峴) : 이 마을은 예전에 까치가 많이 모이는 고개라 까치고개 밑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동쪽은 동까치고개(東鵲峴) 서편은 서까치고개(西鵲峴)로 나누어 부른다.

9. 안녕리(安寧里)



[사진-98 하늘에서 본 안녕리(2001) ]​

안녕리는 태안읍에서는 가장 역사적으로 덕을 본 마을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정조임금이 부왕 사도세자의 능(隆陵)을 화산으로 옮기고 수시로 능 행차를 하였는데 이 때 정조가 행차시에 이 마을에서 부왕의 능을 바라보며 부왕이 편히 잠드시기를 빌고 기원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이 마을 이름을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의 안녕촌(安寧村) 또는 안녕리라고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안녕리라는 이름 자체는 조선 정조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1794년(정조 18) 발간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시절에야 비로소 안녕면(安寧面)으로 나타나고 『화성지』에서도 안녕면으로 9개동을 거느리게 되었다.

○ 돌고지 : 태안읍 안녕 2리를 말하는데 이 마을 뒷산에 돌이 많아 멀리서 바라보면 산의 돌들이 흡사 돌의 꽃(花)이 핀 것처럼 보여서 돌꽃이라고 하였는데 소리나는 대로 돌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0. 진안리(陳雁里)

조선시대 중엽 이 마을에는 숲이 매우 우거져서 기러기떼들이 많이 날아와 진(陳)을 치듯이 앉아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안쪽의 마을은 안진안(內陳雁)이라고 부르고 밖의 마을은 밧진안(外陳雁)으로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숲도 없어지고 기러기도 오지 않으며 마을 지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1. 황계리(黃鷄里)



[사진-99. 태안읍 황계리 ]​

예전 수원군 안녕면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유제처(楡梯處)가 있었던 곳으로 느릅재, 유제처, 유제 또는 황계동이라고 불렸다. 전하는 일설에는 이 마을 한가운데 예전부터 내려오는 우 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우물에서 누런 닭(黃鷄) 한 마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황계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는 설이 있으나 앞의 설이 유력하다고 본다. 유제(楡梯)는 고적(古蹟)이나 지명(地名) 등의 문헌을 기록하는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서도 부 동쪽 5리에 있으며 『화성지』에서도 유제(楡梯)가 부 동쪽으로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 점촌(店村) : 예전부터 이 마을에서는 옹기 등의 질그릇을 파는 점포가 있었다고 전하며 점촌(店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우리말로 점말로 부르기도 하였다.
○ 새터말 : 황계동과 대황교(大皇橋) 사이의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말, 새텃말 등으로 불렸다. 대황교는 정조 임금이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면서 황구천에 놓은 다리로 왕(황제)이 다니는 다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